정부가 행정 디지털화를 추진하면서 지난 5년여간 일반 국민의 혼선을 부채질했던 성씨 입력(표기)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 채 올해에도 호적·주민등록·등기 등 4개 민원업무 전산화사업에 1223억원을 투입하기로 해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일단 시행하면 이후 발생하는 문제점을 바로잡는 데에는 더 큰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 전산화의 특성상 이제라도 국민 성씨 입력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뚜렷한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기준으로 전산화가 확산될 경우 예컨대 주민등록과 호적·여권에 각각 ‘류’와 ‘유’씨로, 혹은 ‘라’씨와 ‘나’씨 등으로 혼용될 수밖에 없어 민원 폭주와 혼선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왜 그런가=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02년 호적을 1차 전산화하면서 두음법칙에 따라 한글 성을 표기한다는 호적예규 499 및 520호에 따라 전산이기지침을 만들어 일괄 적용했다. 문제는 국민정서와 실생활, 다른 정부기관 시스템과의 상호 연동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이다.
대법원보다 20여년 앞서 실시한 주민등록 한글화와 전산화에서는 ‘류’ ‘라’ 씨 등을 인정해왔다. 여권이나 은행, 다른 신분증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주민등록·학교·회사·은행 등의 공적 서류와 호적 성이 달라 불편을 겪는 사례가 급증했다. 류병렬씨(49)는 “수십 년 동안 써온 성을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하루아침에 바꿔버리는 것은 행정편의주의”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측은 “한글맞춤법에 따라 호적예규가 마련됐고 이에 따라 전산화한 것은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문제점 보완 없이 1223억 추가 투자 = 호적예규에 따른 전산화 문제는 법원 사이에서도 엇갈린 판결을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6월 대전지법은 호적상 성 한글 표기를 ‘유’에서 ‘류’로 고쳐 달라는 유모씨(81)의 호적정정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손차준 부장 판사는 “성에 대한 두음법칙 강제는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규정인데도 법률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행정규칙인 대법원 예규로 규정한 것은 헌법에 위배돼 무효”라고 판시했다. 하위법인 예규로 성씨의 한글 표기를 바꾸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확인 소송(2003헌마95)도 4년째 계류 중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대법원의 정보화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대법원은 2002년부터 전산화 2단계 사업으로 등기부등본 인터넷 발급, 인터넷 등기 신청 접수 서비스, 행자부, 금융기관 등 시스템 연계 개발을 시도해왔다. 대법원은 올해도 호적 및 신분등록 업무 전산화, 등기업무 전산화 등 4개 정보화 사업에 1223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해법은 없나=한번 전산화한 후 수정하려면 비용이 들고 국민 혼란도 가중된다. 실제로 정부 시스템 간 연동이 가속화하면서 호적 전산화 1단계가 막 끝난 2002년 당시보다 민원이 증가하고 있다. 등기 및 토지대장 전산화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전자정부 전문 IT서비스 전문가인 김숙희 사장(솔리데오시스템즈)은 “성씨를 전산화하는 데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고 진행했다면 수십 년간 행정업무 전산화에 몸담아온 입장으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주민등록 및 여권 등 정부 시스템 간 불일치를 해결하는 데에만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될 것”으로 내다봤다.
행정자치부 주민제도과 김경희 팀장도 “현장에 나가보면 주민들의 혼란이 상당하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내부에서조차 “헌법재판소 위헌 여부를 기다리는 중이며 이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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