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산악지대나 툰드라 지역에는 쥐의 일종인 레밍스라는 동물이 산다. 3∼4개월에 한 번씩 무리지어 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하는데, 번식력이 강한 이 쥐들은 개체 수가 많아지다가 어느 순간 한 쥐가 물 속에 뛰어들면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뛰어들어 많은 수가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당연히 전체 무리의 수가 조절돼 먹이나 개체별 생존 공간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은 레밍스에는 다행이지만 물에 빠져 죽은 레밍스를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IT산업, 특히 제조업의 근래 현황을 보면 점점 레밍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벤처 버블 시기를 거치면서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은 업체 수가 200∼300개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가 시장이 예상보다 커지지 않거나 상위 업체 몇 곳만 경쟁력을 갖게 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현상이 계속 이어져 왔다. MP3플레이어가 그랬고 PDA·휴대폰·DMB가 그랬다. 최근 폭발적 신장세를 보이고 있는 내비게이션도 100개가 넘는 회사가 뛰어들고 있다고 한다.
IT제조업에서 이 같은 레밍스 현상이 왜 발생할까. 기술이 발전하면서 완제품 개발에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고, 시장 진입 장벽도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먼저 진입한 경쟁자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닐까. 혹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보다 기존에 형성돼 있는 시장에 진입하면 쉽게 매출을 올려 회사 규모를 키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는 레밍스의 세계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냉혹하며 무모하기까지 하다. 돈이 된다고 소문이 나면 너도나도 뛰어들기 시작하는데, 과당 경쟁이 되다 보니 경쟁사 흠집 내기는 기본이고 상대방의 거래처까지 빼앗기 위해 원가 이하 가격을 제시하곤 한다. 이러다 보니 최종 납입을 받는 회사는 손쉽게 가격 경쟁을 붙일 수 있고, 납품회사 간 경쟁으로 오히려 중개상이 이득을 보게 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정상적인 비즈니스를 하려는 회사에는 이러한 과당 경쟁이 엄청난 타격일 수 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서 물에 빠지는 레밍스의 모습을 연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만약 레밍스의 세계에서 누구 하나가 갑자기 물 속에 뛰어들려는 무리를 설득해서 다른 땅으로 개척해 나가자고 한다면 어떨까. 새로운 땅에 가서도 개체 수가 늘어나면 또 다른 땅으로 개척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예상되고 개척할 만한 땅이 과연 있는지 두려울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물 속에 빠져 몰살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개척해 나가는 것, 이것이 진정 벤처들이 해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는 일본의 ‘원세그’ 시장도 이러한 기미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원세그’란 우리나라 DMB와 유사한 이동방송을 말하는데, 작년 4월 본방송을 시작한 이래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국내 시장 정체와 해외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던 지상파DMB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최근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뛰어들고 있는데, 여기에 대만·중국업체들까지 가세해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아직 시장에 많은 제품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올 2분기부터 다양한 제품이 출시될 것으로 업계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과당경쟁, 국내와는 다른 일본 소비자 성향 그리고 일본 산업계의 보이지 않는 카르텔에 의한 시장 보호 의지, 대만·중국회사의 진입 등 국내 DMB 시장보다 훨씬 더 위험스러운 요인들이 있는데도 대책을 마련하기보단 그저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국내 DMB 시장에서 파이가 채 커지기도 전에 과당경쟁이 촉발돼 많은 회사가 업종을 전환하거나 사업을 접은 것이 불과 1년 전인데,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려 하고 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되면서 사람들은 지쳐간다. 팀 리더급 벤처인들도 이젠 이런 상황에 진저리를 치고, 벤처에 투신하려는 젊은 엔지니어 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과연 이대로 계속 가야만 하는가. 새로운 시장 개척, 틈새 상품 개발, 핵심 역량 확보 등에 고집을 부리는 것이 벤처인, 벤처 회사가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정근 코발트테크놀로지 대표 jkji@cobalt-te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