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왜 세계적인 대학은 없는가

 우리나라는 반도체·휴대폰·디지털 가전 등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한다. 그렇다고 방심할 처지는 아니지만 우리의 IT 수준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IT 분야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자랑할 만한 성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사이언스·네이처·셀의 3대 과학저널에 논문을 발표, 세계적으로 조명을 받는 과학자가 늘고 있다. 열악한 국내 이공계 현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성과가 나와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로버트 러플린에 이어 개혁의 기치를 내건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최근 과기계 인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우리나라에는 왜 세계적인 대학이 없는가’라는 화두를 던진 바 있다. IT와 과학기술 부문이 국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연구개발 능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점을 감안하면 응당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진작에 MIT·인도공과대학(IIT)·중국 칭화대 등에 견줄 만한 세계적 수준의 이공계 대학이 나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우리 교육계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공계 대학을 키우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취약성을 극복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대부분 대학이 교수 1인당 학생 수, 연구비, 외국인 유학생 비율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국제적인 수준에 못 미친다. 재정적인 지원이 충분하다면 사정이 좀 나아지겠지만 아직 그럴 형편이 못된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이공계 대학들이 앞다퉈 영어 강좌를 늘리고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 나서는 등 욕심을 부려보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물론 탄탄한 학교재정이 세계적인 이공계 대학 육성의 필요 충분조건은 아니다. 서 총장은 학문 간 경계를 허물고 역량 있는 젊은 과학자를 유인할 수 있는 개방적 연구풍토를 조성하는 게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통섭’의 정신이 없다면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매몰돼 우수한 과학적 성과를 내놓기 어렵다는 의미다.

 MIT 기계공학부가 RFID 분야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교수 간에 전공분야를 뛰어 넘는 소통구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교수와 컴퓨터 과학을 전공한 교수가 횡적인 교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RFID라는 새로운 기술적 지평을 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 총장은 우리 과학계의 연구 풍토와 실적 평가관행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이름난 이공계 대학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초과학 부문을 강화하거나 바로 사업화할 수 있는 응용기술 부문에 역점을 둬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영역에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대학이 교수 임용이나 실적평가 시 SCI급 과학저널 등의 논문발표 건수나 인용건수를 계량화해 평가하는 것도 허점이 많다고 꼬집는다. 젊은 과학자는 나이든 과학자보다 논문 발표건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데,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대학이 모험을 꺼리게 되고 젊은 과학자가 소외되는 현상이 생긴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도 우리 경제력에 걸맞은 세계적인 수준의 이공계 대학을 키울 때가 됐다. 현재 국내에는 카이스트·포스텍·광주과기원·정보통신대학 등 연구중심 대학이 있으며 대부분의 종합대학이 공과대를 두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공계 대학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으로 유학오는 외국인 학생이 증가하고 있지만 지명도는 여전히 처진다. 세계적인 지명도와 명성을 누리는 이공계 대학을 육성하기 위해 대학과 교육당국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왜 세계적인 대학이 없는가’라는 서 총장의 질문에 과기계가 함께 머리를 짜내야 한다.

장길수 논설위원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