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9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박사 과정생 변대규는 그의 대학원 동료·후배 6명과 함께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서울 봉천동 낙성대 입구 뒤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 ‘건인시스템’이란 이름으로 회사를 차린다. 이것이 휴맥스(대표 변대규 www.humaxdigital.com)의 시초다.
◇중핵이 무색한 대형=18년이 지난 지금, 휴맥스는 임직원 650여명에 연매출 7000억원, 자산 6421억원(현금성 자산 1113억원), 시가총액 6000억원(2월말 현재)의 대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중핵기업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휴맥스는 국내 제조벤처 1세대다. ‘코스닥의 삼성전자’라 불린다. 위성 셋톱박스 분야 세계 2위다. 지난 2003년부터는 디지털TV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이제는 ‘디지털 가전’ 기업을 표방한다.
중소 벤처답지 않게 해외거점도 두텁다. 미국에만 두 곳을 포함해 영국, 일본, 두바이, 프랑크푸르트 등 전세계 12개국에 마케팅 법인이 있다. 생산거점도 중국에 두 곳과 폴란드, 인도 등 경기도 용인 라인을 포함, 총 6개다. 연구개발(R&D) 센터는 분당 본사 외에 폴란드 바르샤바에도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분당의 노른자위 땅에 지하 6층 지상 12층짜리 첨단 인텔리빌딩 사옥을 신축, 지난해 10월 입주를 마쳤다. 내후년께면 대망의 ‘매출 1조원’을 달성할 것이라는 게 사내외 관측이다.
◇한계 또는 숨고르기=작년말 현재 휴맥스는 셋톱박스에서 6104억원을 달성했다. 전체 매출의 84%다. 반면 디지털TV는 972억원(13%), 디지털오디오방송(DAB)은 200억원(3%)이었다. ‘휴맥스=셋톱박스’라는 표현답게 셋톱박스의 매출 비중은 절대적이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중저가 일반형 제품으로 꼽히는 SD 및 SD+PVR이 전체 셋톱박스 매출의 85%를 차지한다. 고부가 제품인 HD 및 HD+PVR은 15%에 불과하다.
전송방식별 매출 구성도 기형적이다. 위성 셋톱박스가 74%로 압도적인 반면, 케이블 셋톱박스과 지상파 셋톱박스는 각각 24%와 2%에 불과하다. 차세대 고부가 모델로 꼽히는 IPTV 셋톱박스 매출은 없다. 일반 소비자들에게조차 널리 알려져 있는 자사 브랜드 인지도와는 달리, 전체 매출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하다. 국내 시장에서의 좋은 이미지를 실제 매출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의 이유다.
◇2007, 터닝 포인트에 서다=지금 세계 셋톱박스 시장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지상파나 위성, 케이블 등을 통해 음성·영상 신호를 받아 TV서 볼 수 있게 변환해주는 기존 셋톱박스는 이제 양방향, 개인녹화저장기, 고화질(HD), IPTV 등 디지털 컨버전스 장비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라는 시대적 흐름 앞에서 셋톱박스는 이제 운영체제(OS)를 갖춘 멀티 컴퓨팅 기능을 구현하는 홈 네트워크의 핵심 장치로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휴맥스는 ‘MPEG4 기반 HD 셋톱박스’ 시장을 먼저 치고 나간다는 전략이다. 아직까지 HD시장이 세계적으로 활성화돼있지는 않지만, 올 하반기 이후 각국의 방송사들이 기존 SD에서 HD로 잇따라 전환을 추진할 것이라는 게 휴맥스의 분석이다.
이미 휴맥스는 독일 최대 위성·케이블 방송 사업자에 HD 셋톱박스를 공급했다. 국내서도 KT에 이어 스카이라이프와 CJ케이블넷 등에 HD 셋톱박스의 본격 공급을 앞두고 있다.<표 참조> 특히 최대 수요처인 유럽내 방송사업자와 미국의 디렉TV에 납품할 제품의 개발을 연내 완료, 내년께면 HD 셋톱박스를 이들 업체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휴맥스측 설명이다.
지난 2004년부터 시작한 디지털TV 생산사업은 4년째로 돌입, 올해부터 내부역량이 안정화 단계에 들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삼성·LG 등 대기업들은 사이즈 대형화만 신경을 쓰고 있어, 17∼32인치대 중소형대 시장에서 휴맥스의 차별화 전략이 실효를 거둘 것이라는 기대다.
◆인터뷰-변대규 사장
휴맥스의 변대규 사장(48)은 우리 시대 마지막 벤처 로망스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멋스럽지 못하다. 본인 스스로도 외롭고 부담된다 한다. 연말 모임에 나가기도 겁난다는 게 변 사장의 표현이다. 매디슨, 로커스, 터보테크... 그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1세대 제조 벤처들은 지금 그의 곁에 없다. 하나 남아있던 팬택 역시 지금 존폐의 위기에 있다. 자연스레 모든 시선은 휴맥스에게 몰린다. 변 사장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힘들지만 그만큼의 사명감 역시 느낀다는 그다. 변 사장의 입을 통해 ‘대한민국 대표 중핵기업’의 생존전략을 직접 들어본다.
-최근 가장 신경쓰는 업무는
▲일하는 방식의 개선이다. 휴맥스만해도 이제 직원수 650명에, 1조원 매출을 눈 앞에 둔 거대 벤처다. ‘형님’ ‘동생’하며 어울리던 봉천동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더이상 그런 식의 회사 운영은 안된다. 지난해에는 6개 사업분야별로 외부 컨설팅도 받았다.
일하는 방식의 질적인 변화를 통해 내부혁신을 이루려한다. HW설계와 구매, 생산방식, 물류 등 모든 분야를 바꾸겠다. 근본적으로 일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경쟁할 수 없다는 문제인식을 가지고 작년부터 혁신활동을 시작했다. 내년말까지 3년 내에 이를 완성하겠다. 팬택 사태의 원인도 내부 시스템 혁신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채 너무 빨리 성장해 버린 데서 찾을 수 있다.
-내수시장 비중이 너무 낮은데.
▲동감한다. 그래서 그 비중이 올리려 하는데, 솔직히 만만찮다. 우선 국내 시장은 해외시장에 비해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이다. 수출은 한 2년 고생해 일정 진입장벽만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통신·방송사업자를 상대로 한 영업은 그렇지 못하다. 차근차근 노력하겠다. 순리대로 풀어가겠다.
-올해 목표는
▲매출은 8500∼9000억원을 달성하겠다. 이 가운데 셋톱박스 비중이 6500∼6700억원 가량 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위성시장에서 확고한 1위 지위를 획득하고 주요 유통시장과 유럽·아시아 케이블 시장서도 1위를 획득하겠다. 폐쇄적인 미국 케이블 시장과 다소 생경한 IP 셋톱박스 분야 진출도 숙제이자 목표다.
류경동기자@전자신문, nin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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