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岡目八目(강목팔목)’. 관전자가 대국자보다 8집을 더 보게 된다고 한다. 이해관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나무 아닌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1백집을 더 보더라도 훈수는 금물이다. 동네 바둑판에서 종종 벌어지는 멱살잡이는 대개 오지랖 넓은 훈수꾼 탓이다. ‘훈수는 뺨이 석 대’라는 속담이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기업 쪽으로 넘어오면 훈수에 대한 예우가 확 달라진다. 요즘 조찬행사장에 가보라. 반백의 경영자들이 젊은 유명강사의 훈수를 놓칠세라 호텔 주차장부터 뜀박질도 마다 않는다. 성공의 금과옥조인 양 한마디 한마디 받아적는 그들의 프로필에는 비장함마저 서린다.
올빼미형 인간이던 나 역시 새벽잠을 설쳐가며 조찬 행사장을 기웃거렸다. “이래라 저래라 간섭마세요. 조직은 자율적으로 돌아가야죠.” “과감한 아웃소싱이 살 길이에요.” “천재급 핵심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길게 못 갑니다.” “칭찬해 보세요. 고래도 춤춘다잖아요.” “위대한 기업들은 큰 돈 안 되는 것은 과감히 버렸답니다.” “뭐니뭐니해도 블루오션 전략이죠. 공부하세요.” 모두가 조찬 후 회사로 돌아가는 길을 두근거리게 했던 8집짜리 훈수들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지갑 톡톡 털어 구입한 책만도 기십권이다. 잭 웰치를 비롯해 아이아코카, 손정의, 카를로스 곤, 이건희, 신격호, 도널드 트럼프 등 경영대가들과 칭기즈칸, 한니발, 손자, 제갈공명, 이순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위대한 장수들에 관한 책이며 경영·경제·역사·심리학·과학 등 전문서적까지 책장 선반은 주옥 같은 훈수들로 주저앉기 직전이다.
그러나 곧이 곧대로 훈수 따라 해보라. 자율적 조직은 곁길로 새기 십상이다. 아웃소싱하다가 기술축적이 안 돼 고생인가 하면 중소기업 형편에 천재급을 모시려다 내부 인력의 반발로 애먹는 경우도 적잖다. 고래를 춤추게 할 일도 없을 뿐더러 화수분이 없는 처지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다고 무작정 기존 사업을 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21세기 최고의 특효약이라는 블루오션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이런 고민에 빠진 내게 떠오른 이솝우화 한 토막: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언제나 채찍만 돌아오는 당나귀와 별로 하는 일 없이 주인의 귀여움을 받는 강아지가 있다. 하루는 기고만장한 강아지를 보다 못한 당나귀가 염소에게 훈수를 구했다. “질투만 하지 말고 당신이 강아지처럼 행동해야 하오. 모든 것은 당신하기 나름이라오.” 그날 저녁 당나귀는 주인이 사립문을 들어서자 주인 몸에 매달려 얼굴을 핥고 애교를 부렸다. 당연히 주인은 사색이 됐고, 노비들이 몰려들어 당나귀를 흠씬 팬 뒤 문 밖으로 내쫓았다.
‘경영학의 아인슈타인’이라는 클레이턴 크리스텐슨(미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도 ‘성공스토리의 비결은 특정 시간이나 상황에서만 맞아떨어질 뿐 범용성이 낮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범 경영사례를 흉내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경영자들의 필독서 ‘초우량기업을 찾아서’에 소개된 46개 일류기업 가운데 현재 생존한 기업이 불과 6개뿐이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럼 어쩌란 말인가. 혼자 알아서 해보라는 건가. 루이스 빌의 경구가 약간의 힌트를 준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누구와 이웃이 될 것인지 선택하라.’ 뭐든 고지식하게 베끼기보다는 자기현실에 맞는 것을 취사선택하라는 뜻이다. 데카르트식의 방법론적 회의(懷疑)를 하며 자기 기업에 걸맞은 가장 확실한 것을 걸러내라는 얘긴데, 이를테면 자율성 부여는 가능한 영역 내에서만 수행해 보고 아웃소싱도 기술축적이 필요치 않은 영역에 한정하며 자기 사람을 키우는 데 더욱 공을 들이는 것이다. 어떤 고래를 춤추게 할지도 고민해보고, 실없이 위대한 기업을 꿈꾸지 말고 캐시카우가 생기기 전까지는 수익이 적더라도 기존 수익모델을 키워가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절박한 심정에 훈수를 찾아 조찬간담회마다 출석부 도장을 찍고, 인터넷서점을 기웃거린다. 다만 조훈현 9단의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바둑은 오직 본인이 판에서 해결하는 것이오.”
◆주태산 맥스무비 사장 joots@maxmovi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