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지난 27일 오후 2시 베이징 중심부에서 택시로 30분을 달려 중관춘에 들어섰다. 흡사 우리나라의 용산상가를 연상케 하는 중관춘 중심을 지나 서자 중국 소프트웨어(SW) 연구개발(R&D)의 산실인 ‘소프트웨어파크(軟件園)’가 나왔다.
입구에는 IBM의 PC사업부를 인수한 레노버의 R&D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파크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출퇴근 시간과 점심 시간 외에는 파크 내 사람이 거의 없다.
레노버를 뒤로 한 채 세계 최대 기업용 SW업체인 오라클의 ‘아시아 개발센터’로 들어섰다. 파크 내 조용함과는 대조적이었다. 지난 2003년 문을 연 오라클의 개발센터는 SW 개발 열기로 후끈했다. 보안은 철저했지만, 내부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오라클은 이 곳에서 프로토타이핑, 아키텍처 설계 등 SW의 핵심 기능을 개발, 제품에 탑재해 아시아는 물론이고 글로벌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아시아 시장에 대한 투자를 강화중인 오라클은 베이징과 선전 등 2곳에 R&D센터를 운영 중이다.
케빈 월시 오라클 아·태지역 R&D센터 총괄수석부사장은 “오라클은 많은 기업의 본사와 연구시설, 선도적인 대학교 및 국가기관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베이징이 아시아 지역을 커버하는 R&D센터 최적의 장소”라며 “중국 고객들은 오라클의 최신 개발 및 테스팅 시설을 통해 최신의 솔루션을 곧바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크 내에는 레노보와 오라클 외에도 외국 SW업체와 중국 업체 150여개가 입주해 있다. 현재 1.4㎢ 규모의 파크는 아직도 공사 중이다. 올해 2기 공사가 끝나면 총 1.6㎢ 규모가 된다. 호텔과 헬스클럽 등 편의시설도 한꺼번에 들어선다. 공사가 완료되면 기업 수는 거의 2배 규모로 늘어나며 개발자만 6만여명이 근무하게 된다.
왜 파크로 SW 기업들이 몰릴까. 먼저 세금감면 혜택이 외국계 기업을 유혹한다.
중국 정부는 단지 내 입주한 외국계 업체들에 SW업체 인증을 준 후 이익을 낼 때까지 세금감면 혜택을 준다. 이익을 내더라도 5년 동안은 세금감면 혜택을 그대로 받는다. 또 파크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아파트나 콘도를 구입할 때도 파격적인 할인율을 적용해 준다.
근무여건도 좋다. 베이징 중심부의 매쾌한 공기와 혼잡한 교통상황과 달리 파크는 쾌적하고 교통편도 좋다. 초고속 인터넷과 각층마다 각종 편의시설은 외국 개발자들에게 마치 고국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파크 어디에서도 중국 사회의 경직됨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도 자유분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이 향후 세계 최대 SW 시장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외국계 SW업체들은 중국 정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미래를 예약해 두기 위해 중국 시장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최근 외국계 SW업체들이 국내에도 R&D센터를 설립하고 있지만, 중국에 비하면 그 규모가 작고 역할도 거의 없다.
그렇다고 중국이 단순하게 외국계 업체만을 유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파크를 건립하며 ‘중국의 실리콘밸리’ 건설을 선언했다.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을 위한 제11차 5개년 계획(2006∼2010년)’의 핵심인 ‘자주 기술 혁신’의 심장부가 바로 이 SW파크다. 단순히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SW 연구개발을 통한 독자 브랜드를 만들어 세계 시장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파크 건설은 중국을 하드웨어(HW) 중심에서 고부가가치의 SW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중관춘 소프트웨어파크 관리자는 “파크는 중국 SW 기업 창업의 출발점이며 성장과 도약의 무대”라고 말한다. 그는 “자주 기술 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SW업체를 육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중국의 리눅스업체인 홍기리눅스와 전사자원관리(ERP)업체인 용우소프트는 글로벌 SW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래리 정 홍기리눅스 이사는 “중국 정부는 SW의 가치를 인정하고 세계적인 브랜드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며 “중국 SW기업들도 내수 시장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내 SW업체들이 규모의 영세성과 수익 악화에 시달리는 사이에 중국 SW업체들은 세계 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최근 용우소프트 등 일부 중국 SW업체들은 국내 SW업체와 합작을 시도하며 국내 시장 진출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느 날 눈 떠보면 중국 SW가 우리 기업의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재구팀장@전자신문, jklee@etnews.co.kr, 김익종기자, 성호철기자
◆중관춘 아시아눅스 개발자들
27일 오후 4시 파크 내 단지에서 박종오 한글과컴퓨터 과장을 만났다. 그는 “한·중·일 SW가 합작해 개발 중인 아시아눅스의 한국 측 대표기업인 한글과컴퓨터를 대표해 중국에 들어온 지 2년이 지났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어제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한다. 3국의 개발자들이 일을 나눠서 하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개발자들 간의 자존심 경쟁이 심해 웬만하면 일을 미루지 않고 약속한 날짜에 끝낸다”며 “한국을 대표해서 왔는데 중국과 일본에 밀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파크 내 아시아눅스 개발자 사무실은 한국과 중국, 일본 개발자 10여명이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 컨설턴트로 근무 중인 미국인까지 가세, 마치 미니 글로벌 SW 개발자 경연장을 보는 듯했다.
박 과장은 그의 개발자 동료들을 소개했다. 일본인인 준 요시다 아시아눅스 개발팀장은 벌써 3년 넘게 파크 내에서 살고 있다.
그는 “여러 문화을 갖고 있는 개발자들이 함께 모여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라며 “한동안 언어 문제로 고생했지만, 지금은 눈빛만 봐도 서로 뭘 원하는지 안다”며 팀워크를 강조했다.
케이스 홉킨스 아시아눅스 컨설턴트는 “파크 내 아시아눅스 개발자들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도 협력을 통해 다양성을 혼합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데 익숙하다”며 “미래의 SW 개발 환경을 옮겨놓은 듯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중국 SW산업의 미래을 밝게 봤다. 아직은 글로벌 수준과 차이가 있지만 잠재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박 과장은 “중국은 중관춘 소프트웨어파크 같은 SW 개발 단지를 집중적으로 개발해 SW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며 “국내 기업들이 긴장하지 않으면 추격당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요시다 팀장은 “중국은 매년 수많은 SW 공학도를 배출해 기업으로 보낸다”며 “일본과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라고 말했다.
물론 부정적인 의견도 없지 않다.
홉킨스 컨설턴트는 “중국은 오픈소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공개 SW업체들이 비즈니스하기 어렵다”며 “중국 SW업체들은 오픈소스가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줄 것이라는 사실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요시다 팀장은 “중국은 불법복제 SW가 난무하고 있지만 대책이 없다”며 “중국도 SW 불법복제가 산업 발전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