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의 입명관(立命館:리츠메이칸) 대학은 지난 96년 세계 최초로 학부 과정에 로보틱스학과를 도입한 곳이다. 이후 리츠메이칸 대학은 체계적인 로봇교육의 모범사례로서 일본은 물론이고 외국 대학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고 첨단 로봇연구에서도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교토 외곽에 위치한 리츠메이칸 대학은 일본 관서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사립대다. 2차 대전 이후 평등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진보적 학풍을 견지하며 대학교육과 제도개혁에 가장 앞서는 대학으로 평가받아 왔다. 특히 리츠메이칸은 이공학 분야에서 일본 대학계의 쌍두마차인 국립 도쿄대와 교토대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관료적인 국립대학들이 산업변화에 둔감하게 대처하는 동안 리츠메이칸 대학은 발빠르게 생명공학, 반도체, 마이크로시스템 등 유망학과를 신설하고 일본기업들이 필요한 인재를 적시에 배출해왔다.
리츠메이칸 대학이 로보틱스학과를 가장 먼저 설립한 배경도 이미 90년대 중반에 기계와 전자, 전기공학 등이 융합된 첨단 로봇산업이 부상할 것이란 트렌드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교토 중심부에서 차로 한시간 떨어진 이 대학의 비와코 쿠사츠 캠퍼스(BKC)에는 이공학부와 경제, 경영, 컴퓨터 등 4개 학부가 운영되고 있다. 이공학부에 속한 로보틱스 학과는 지난 96년부터 매년 80명의 신입생을 선발해왔고 교수는 13명, 연구실도 11개에 달한다. 로봇학과를 설립할 당시 대학당국이 일본 각지에서 유능한 교수진을 대거 스카웃한 탓에 한동안 여타 대학들의 로봇연구가 타격을 입을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리츠메이칸의 원로교수 중에는 현지 로봇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일본로봇학회 회장 출신이 두 명이나 있다. 또 로보틱스 교수들의 전공도 기계, 생체공학, 전자, 컴퓨터 등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우수한 교수진 덕분에 이곳 학부출신들은 로봇개발에 필요한 기초지식과 경험이 여타 대학출신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와무라 연구실=사람의 팔힘을 수십배 증폭시키는 인공팔(MMSE:Man Machine Synergy Effector)을 직접 작동할 수 있었다. 이 장치에 손을 넣으면 센서가 작동해 커다란 인공팔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다. 손가락을 살짝 누르니 인공팔 끝에 끼워 넣은 커피캔이 순간적으로 납작해진다. 연구실 관계자는 머지않아 작업자들이 MMSE를 착용하고 무거운 물체를 옮기거나 재난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벽이나 바위를 ‘기계손’으로 직접 치우는 상황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일본만화에 흔히 나오는 인간과 로봇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탑승형 로봇의 작동방식이 여기선 실제로 구현되고 있다.
◇히라이 연구실= 이곳에선 공압으로 몸을 받쳐주는 로봇수트용 펌프, 인공근육을 이용한 바퀴 등 다양한 로봇부품을 개발 중이다. 히라이 교수는 낮은 전력에도 작동하는 초소형 공기펌프를 만들면 사람의 체력소모를 크게 줄이는 로봇수트 개발이 앞당겨 진다는 설명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로봇개발에 꼭 필요한 핵심부품부터 차근차근 개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시마다 연구실=연구실 책상 위에 기자의 가방을 놓아두고 시간이 흐른 다음 저 물건의 주인이 누구냐고 로봇에게 물어봤다. 즉시 본인의 이름이 튀어 나온다. 실내에 설치된 카메라로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지나간 행동까지 연계시키는 보안기술이다. ◇노가타 연구실=몸 속에 들어가서 환부만 직접 치료하는 초소형 의료로봇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마치 번데기처럼 생긴 의료로봇은 길이 2cm, 무게 5g에 불과하지만 초소형 카메라, 주사기, 집게 등을 내장하며 강력한 전자석의 힘으로 몸 안에서 조금씩 환부까지 이동할 수 있다. 수술에 따른 환자의 신체적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의료계의 관심이 높다고 노가타 교수는 소개했다.
리츠메이칸 대학의 로봇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실생활에 꼭 필요한 로봇기술부터 우선 개발하는 실용적 노선을 택했다는 점이다. 여타 일본대학들이 예산확보를 위해 시연용 로봇개발(이족보행, 인간형 로봇)에 적잖이 신경을 쓰는 것과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학부와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하나로 연결된 리츠메이칸의 안정된 로봇교육환경이 낳은 결과로 해석된다. 리츠메이칸의 성공적인 로봇학과 운영에 자극받아 지난 2000년 이후 가나자와 공대, 치바공대, 동양대, 나고야 공대 등 6개 일본대학이 학부과정에 로봇학과를 신설했다. 최근 미국도 유타대학과 조지아 공대 등에서 학부생을 위한 로봇과정을 속속 도입하는 모습이다. 이같은 로봇교육의 대세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앞장선 리츠메이칸 대학당국의 안목과 추진력은 로봇테마에 관심을 두는 국내 대학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 대학의 로봇교육 현황
우리나라에서 로봇교육을 위한 학과설립은 지난 78년 서울공대에 생긴 제어계측공학과가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제어계측공학과는 기계와 전자과를 합쳐 자동화 전문인력을 양성하자는 취지로 설립됐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92년 서울대의 학부 통폐합에 따라 사라졌다. 학과의 양대축인 기계과, 전자과 교수간의 협조체제가 원할하지 못했고 당시는 제어계측과 졸업생을 원하는 국내 산업수요도 미약했기 때문이다. 이후 침체기에 접어든 대학가의 로봇인력양성은 최근 2∼3년새 정부의 로봇산업 육성책에 따라 다시금 활기를 띄는 추세다.
현재 전국에서 ‘로봇’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학과가 있는 대학교는 총 12개. 이밖에 대학원의 로봇전문과정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와 한양대, KAIST 등에서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대학가의 로봇학과 설립은 우후죽순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로봇학과에 필요한 교수진과 교재, 커리큘럼이 아직 빈약하다는 것. 또 일부 대학은 학생모집을 위해 기존 학과의 간판만 로봇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어 수업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로봇붐에 편승해 무조건 학과수만 늘릴 것이 아니라 로봇교육의 질적개선을 위한 연구와 투자가 시급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인터뷰-히라이 신이치 리츠메이칸 대학교수
“초창기 로보틱스 학과도 학생모집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가장 취직이 잘되는 인기학과로 자리잡았습니다.” 히라이 신이치(44)교수는 로봇전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던 지난 90년대 후반을 회상했다. 학부모들이 낯선 로봇학과 대신 기계, 전자과를 가라고 자녀들의 등을 떠밀었다는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로봇학과 출신들의 취업률이 더 높고 교육에 대한 만족도 높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고 말한다. 히라이 교수는 로보틱스 학과 졸업생 중에서 로봇회사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고 지적한다. “로보틱스는 전기, 전자, 기계 등의 통합전공이기 때문에 자동차, 정밀기계, 식품, 의료공학과 등 어떤 분야에 가도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는 그동안 여러종류의 커리큘럼을 운영해본 결과 요즘 한국에서 신설되는 로봇학과도 1∼2학년때는 기초과목에 집중하고 로봇전공은 고학년에 시키는 편이 낫다고 충고했다. “로보틱스 학부생 중에서 석사로 진학하는 비중이 절반인 40여명이나 됩니다. 로봇분야의 고급인력 수요가 높다는 뜻이죠” 리츠메이칸 대학의 로봇학과 설립결정은 시기적으로 가장 적절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일본의 경기불황이 극심할 때도 로봇학과 출신들은 거의 100%에 가까운 취직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히라이 교수는 90년대 중반에 기계, 전자, 바이오 등 융합학문의 부상을 예측했던 대학당국의 판단이 맞았다면서 앞으로 인간의 편의를 도모하는 로봇기술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교토(일본)=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로봇학과 설치 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