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하늘에는 오직 하나의 태양만이 존재할 뿐. 요즘 인터넷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본좌’는 한 명뿐”이다. e스포츠계의 본좌 자리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천재 테란’ 이윤열(팬택EX)과 ‘마에스트로’ 마재윤(CJ엔투스)이 경기장 밖에서 만났다. 강렬한 포스를 뿜으며 스타리그와 MSL, 슈퍼파이트 등 초대형 e스포츠 무대의 메인 이벤트를 달궈 온 두 선수지만 경기장 밖에선 얌전한 청년들이었다. 수줍게 대화하는 모습에선 무대 위에서 느껴졌던 강력함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e스포츠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그들은 영락없는 ‘전사’였다.
◇e스포츠의 상징 = ‘황제’ 임요환의 군 입대로 인한 공백은 기우에 불과했다. 부진을 털고 다시 정상급 선수로 올라선 이윤열과 유례 없는 경기력을 과시하며 1∼2년 사이에 최고의 자리로 치고 올라온 마재윤의 대결 구도는 팬들의 열광을 이끌어 내며 e스포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두 선수는 최근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2005년에는 1승 1패씩을 주고 받았으나 2006년 이후에는 마재윤의 우세. 마재윤은 작년 12월 열린 ‘제3회 CJ 슈퍼파이트’에서 MSL 우승자 자격으로 참가, 스타리그 우승자 이윤열을 꺾은데 이어 지난 2월 벌어진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3’ 결승전에서도 이윤열을 물리치고 우승컵을 안았다. 그러나 이윤열은 지난달 벌어진 ‘신한은행 마스터즈 리그’에서 마재윤에 일격을 날리며 우승, ‘마재윤 징크스’를 털어냈다.
이런 라이벌 대결 속에 두 선수는 e스포츠의 최고 우상이자 아이콘으로 확고히 자리를 굳혔다.
◇“내가 1위” vs “탈환할 것” = 아이콘이라는 위치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두 선수 모두 “받은 사랑만큼이나 e스포츠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2000년 데뷔한 이윤열은 그 5∼6년 동안 e스포츠계에 있었던 변화를 생생히 지켜 봤다. 선수들끼리 설거지하고 빨래하며 지하철 타고 이동하던 초창기를 거쳐 온 그는 “요환이 형을 비롯, 수많은 선배 게이머들이 앞에서 길을 닦아 왔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며 “미래의 선수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는 e스포츠 환경을 만들기 위해 지금 팬들에게 더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
마재윤 역시 “프로 데뷔 후 3년여 동안 e스포츠에 대한 팬들의 사랑을 실감했다”며 “e스포츠 판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는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e스포츠의 미래에 대한 열정에서 한마음인 두 선수. 이들은 서로 최고의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 선수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뿐인 본좌 자리를 놓고선 양보란 없다. 마재윤은 “지금까지 몇 차례 우승하며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내려온 스타 선수들은 종종 있었다”며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을 하고 싶다, 최고의 자리를 계속 지켜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맞서 이윤열은 “재윤이가 4개월째 지키고 있는 프로게이머 랭킹 1위 자리를 이제 찾아올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레이스는 시작됐다 = 스타리그와 MSL 예선이 시작된 가운데 14일엔 프로리그가 개막한다. 올해부터 프로리그 경기 일 수가 주 5일로 배 이상 늘어나면서 일정은 더 빡빡해졌다. 그래서 두 선수는 운동으로 몸을 만들며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대회에 나가고 싶어 ‘몸이 뻐근하다’는 이윤열은 웨이트트레이닝에 열중하고 있다. 마재윤은 무릎이 안 좋아 헬스 외에 수영을 병행하고 있다.
이윤열은 “올해 일정은 정말 힘들 것 같다”면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경기가 있다는 것은 선수에게 행복”이라고 말했다. 팀의 에이스로서, 특히 모기업의 어려움으로 뒤숭숭한 상황이라 더 프로리그 우승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 개인리그에 대해선 “이전 패배에 대한 복수라든지 여러 개인적인 사연을 풀어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마재윤 선수 역시 목표는 팀의 우승. 특히 그는 “10월에 열리는 WCG(World Cyber Games) 시애틀 대회(그랜드 파이널)도 가고 싶지만 무엇보다 올 여름 광안리(전기 프로리그 결승전 개최지)를 밟고 싶다”며 최고의 무대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학생이 제일 부러워.” = 요즘 청소년 선망 직업 1위라는 프로게이머, 그 중에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두 선수. 하지만 부러운 마음이 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름 아닌 일반 학생들이다. 프로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자신을 던지는 이들은 공부하고 미팅하고 친구 만나는 학생들이 제일 부럽다. 마재윤은 “20살 젊은이로서의 추억이 없는 것이 아쉽다”라고 말한다.
슬럼프에 빠지거나 좌절감을 느껴 힘들 때엔 이런 마음이 더 커진다. 모든 스트레스를 혼자 견뎌내야 하는 프로게이머는 그래서 더 따뜻한 여자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고 이들은 느낀다. 또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악플. 이윤열은 “인터넷 악플을 보면 댓글을 달고 따지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라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이들은 모든 것을 걸었고 꿈을 이뤘기에 후회는 없다. 이윤열과 마재윤은 “훗날 되돌아 봤을 때 우리가 e스포츠의 종주국임이 자랑스러워 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세희기자@전자신문, h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