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RA 07 로봇윤리워크숍
로봇에도 윤리(倫理)가 필요한가. 지난 14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로봇자동화학회(ICRA)에서는 로봇윤리라는 생경한 주제를 놓고 전문가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날 ICRA의 마지막 행사로 열린 로봇윤리 워크숍에서는 우리 정부 관계자가 로봇윤리헌장의 추진배경을 직접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로봇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막연한 불안감도 싹트고 있다. 로봇이 사람처럼 영리해진다면, 그리하여 로봇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공상과학영화에서 보던 ‘기계의 반란’이 실제로 일어나지나 않을까. 로봇의 진화가 계속되는 한 21세기의 인류는 새로운 형태의 지능체(로봇)와 필연적으로 공존할 것이며 큰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로봇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일부에서는 로봇기술을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 이른바 ‘로봇윤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면 로봇의 반란이란 쓸데없는 상상일 뿐이며 로봇산업의 발전에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인문학 전통이 강한 유럽 공학계는 로봇의 설계, 제조, 사용에 영향을 주는 각종 윤리적 문제를 학술적 토의의 장으로 일찍부터 끌어 들였다. 로봇윤리(RoboEthics)란 단어도 지난 2004년 유럽의 한 로봇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정립된 개념이다. 이 때 EU산하의 로봇기술연구단체인 유럽로봇연구네트워크(EURON: European Robotics Research Network)은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아서 로봇윤리에 대한 로드맵을 만드는 3개년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 14일 로마에서 열린 국제로봇자동화학회(ICRA)의 로봇윤리워크숍에서는 EURON이 다듬어온 로봇윤리 로드맵의 최종본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은 거창한 윤리헌장, 선언보다 영향력이 훨씬 낮은 학술적인 권고안에 불과하다. 그 내용 또한 전문용어와 학술적 정의로 꽉 채워져 이해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하지만 로봇의 윤리문제에 대한 국제적 노력으로 만들어낸 첫번째 결과물이란 점에서 주목할 가치는 높다.
△로봇윤리 로드맵은 서두에서 ‘로봇의 윤리(Ethics of Robot)란 없다’라는 역설적인 전제로 출발한다. 향후 10년간의 근미래를 내다볼 때 로봇이 자아를 지닌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 단순한 기계덩어리를 상대로 행동윤리 또는 먼 미래의 위험성을 논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로봇윤리란 로봇을 제조하고 사용하는 ‘인간의 윤리’(Ethics of Human)일 뿐이라고 로드맵은 지적한다. 로봇윤리를 인간의 윤리로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한결 쉬워진다. 다음은 로봇윤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가치, 명제들을 차례로 다시 정리한다. 어떤 개념도 검증과정에서 예외는 없다. 심지어 로봇세계의 헌법격인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대해서도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로봇윤리 로드맵은 최종적으로 각종 로봇의 유형별로 이로운 점과 문제점을 나열한 다음 문제해결을 위한 권고안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산업용 로봇은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는 반면 생산직 일자리를 감소시킨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복지정책과 기술 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며 권고하는 식이다.
워크숍에서 피사대학의 파올로 다리오 교수는 “로봇윤리 로드맵은 강제성이 없는 학술적 권고안이지만 앞으로 EU가 로봇관련 입법활동을 할 때 기초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로봇윤리 로드맵의 권고사항을 더욱 세분화시킨 로봇윤리 백서가 오는 2009년까지 출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거룩한 로봇윤리규범을 기대했던 한국인들에게 EURON의 로봇윤리 로드맵은 너무 신중한 접근방식과 내용 때문에 꽤 실망스러울 것이다. 반면 유럽인들은 두리뭉실한 윤리선언보다 기계로봇이 파생시킬 단기적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구체적 행동지침부터 만들기로 결정했다. 문제의 핵심은 로봇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시스템이라는 것. 로봇의 반란은 다음 세대가 걱정해도 늦지 않은 주제라고 유럽현지의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로봇윤리 로드맵 외에 세계각국의 로봇학자들이 로봇매춘, 로봇실업, 무인전쟁 등 다양한 주제 발표로 회의장을 뜨겁게 달궜다. 로봇윤리의 첨예한 문제에 대해서 유럽, 미국, 일본 등 국가별로 시각차가 뚜렷하게 벌어지는 모습도 나타났다. 미국과 일본의 로봇전문가들은 EU가 주도해온 로봇윤리의 제도화에 대해서 원칙에는 동감하지만 적극적으로 따를 의사는 없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일본 와세다대학의 한 발표자는 나라마다 윤리의식의 문화적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일본과 유럽의 로봇윤리는 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훗날 EU가 윤리적 문제를 내세워 일본 로봇제품을 규제하려는게 아닌가 경계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군사용 로봇과 같은 민감한 문제도 여전히 겉돌았다. 일부 미국학자들은 다른 나라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로봇기술의 사용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날 회의장에서 로봇윤리헌장에 대해 발표한 한국 대표단은 가장 돋보인 팀이었다. 민간단체가 아닌 정부차원에서 로봇윤리를 명문화하는 세계최초의 사례로 주요 외신에서 크게 소개됐기 때문이다. 산자부의 심학봉 로봇팀장은 주제발표를 통해 “한국사회가 노령화로 서비스 로봇수요가 크게 늘면서 로봇과 인간의 관계도 새롭게 규정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면서 한국 로봇산업의 전망과 로봇윤리헌장의 추진배경에 대해 상세히 소개했다. 특히 유럽학자들은 한국정부가 로봇윤리헌장을 제정하면서 유럽의 연구사례를 최우선으로 반영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크게 고무된 모습이었다. 워크숍에 참석한 김대원 명지대 교수는 “유럽의 로봇윤리연구는 우리보다 확실히 앞섰다”면서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춘 로봇윤리헌장을 만들려면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전문가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장마르코 베루지오 제노아 국립로봇연구원 교수
“로봇윤리는 로봇기술을 반대하는 논리가 아닙니다. 로봇기술의 긍정적 확산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하자는 겁니다.”
이탈리아 제노아 국립로봇연구원의 장마르코 베루지오(53) 교수는 세계 로봇학계에 로봇윤리란 개념을 최초로 정립시킨 선구자로 꼽힌다. 베루지오 교수는 지난 2004년부터 IEEE 로봇 자동화 협회의 로봇윤리기술위원회 공동의장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로봇윤리 로드맵을 첨단 로봇기술에 대한 규제수단으로 보는 일부 시각에 대해 부담감을 표시했다. “학자적 양심으로 로봇기술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객관적 입장에서 권고안을 만든 것 뿐입니다. 로봇윤리 로드맵이 장차 법적제도로 자리잡느냐는 EU정부가 결정할 문제지요” 베루지오 교수는 로봇을 보는 시각은 국가와 문화풍토에 따라 상이하기 때문에 로봇윤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많은 유럽인들이 로봇을 무섭게 표현한 SF영화, 소설 때문에 기계로봇의 지능화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로봇이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어디까지나 자동화(autonomy)의 연장선일 뿐 생명체의 자유의지(free will)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구분한다. 따라서 지능형 로봇을 폐기해도 쓸데없는 죄의식으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설명이다. 베루지오 교수는 첨예한 로봇윤리 문제에 대해 국제적 합의를 이루려면 다른 종교, 문화권의 활발한 교류가 필요하다면서 로봇윤리헌장의 제정에 나선 한국정부의 적극적 행보에 대해 반가움을 표시했다.
“인류를 이롭게 할 로봇기술이 정치, 종교적 이유로 배척당해선 안되죠. 유럽과 문화풍토가 다른 한국에서 독자적적인 로봇윤리체제를 만든다면 여타 아시아 국가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로마(이탈리아)=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