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8일, 포항시 기계면에 위치한 기계장터 마을정보센터 2층. 9명의 결혼 이주여성이 인터넷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컴퓨터 앞에서 한글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10대의 컴퓨터가 촘촘하게 설치된 불과 18평 남짓한 좁은 교실이지만, 필리핀과 베트남,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이 컴퓨터와 한글을 배우기 위한 열기로 후끈거렸다.
“너무 재밌어요. 열심히 배워서 일곱살배기 아들에게 가르쳐줄 거예요.”
일주일에 두 번은 인근 대학의 교수에게 영어 개인교습을 하고, 보석공장에서도 일한다는 마릴로 씨(49). 그는 7년 전 필리핀에서 국제결혼을 통해 이곳에 정착한 이주여성으로 일주일 중 컴퓨터를 배우는 수요일이 가장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원종세 마을정보센터 고문(57)은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지난달부터 한글교육을 병행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두 달이 채 안 됐지만 참여율도 기대 이상으로 높고 학습효과도 빠른 편”이라고 말했다.
지난 5년 전 필리핀에서 결혼과 함께 이곳에 이주해 온 노리씨(32)의 경우도 다섯 살, 세 살배기 두 딸과 5개월된 아들이 있지만 매주 수요일은 만사를 제쳐놓고 이곳을 찾아온다고 한다.
아직 한국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한국말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컴퓨터를 배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선생님이 자상하게 가르쳐줘서 너무 재미있고 한글 실력도 꽤 늘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이주여성들이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가장 불편을 느끼는 것 중 하나는 국내 인터넷사이트의 회원가입문제다. 결혼 후 2년이 지나면 어엿한 한국인으로서 주민등록증까지 나오지만 실제로 인터넷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실명인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홍작 경북도 정보화교육담당자는 “이주여성들이 인터넷을 배워도 현재 주민번호로는 실명인증이 안 되고 있는데 최근 이 같은 민원이 급증하고 있어 조만간 시스템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 기계면에는 필리핀과 베트남·일본·중국에서 결혼과 함께 이주한 여성이 20명 정도다. 이 가운데 13명이 마을정보센터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 열리는 이주여성 대상 한글 및 컴퓨터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장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7명은 거리가 멀거나 직장에 다니는 경우고, 일부는 남편 등 집안에서 이주여성을 보내주기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마을정보센터 운영위원장은 귀띔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3년간 결혼으로 귀화한 이주여성이 7만6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며,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대구경북지역에서만 약 8000명의 이주여성이 거주하고 있고, 이 가운데 한글이나 컴퓨터 교육과 같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있는 여성은 약 10%에 그치고 있다. 실제로 경북도에 따르면 이주여성 가운데 마을정보센터를 통해 한글과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는 여성은 현재 870여명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주여성에게 마을정보센터는 단순히 컴퓨터나 인터넷, 한글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라 한국문화를 익힘으로써 한국사회에 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주여성은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 사회적 편견 등으로 인해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또 다른 한국인이다. 작은 공간이지만 마을정보센터에서는 이들이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이 조금씩 여물어가고 있었다.
◆인터뷰-안영선 인터넷 선생님
“제 자신이 컴퓨터를 배울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제 막 컴퓨터를 접한 결혼 이주여성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결혼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인터넷 선생님 안영선씨(44)는 “아직 배우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 둘 다 서툴지만 즐겁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도가 임명한 프로그램 관리자인 안씨는 한때 심각한 주부 우울증을 앓다가 정보화마을 컴퓨터 교육과 인연을 맺으면서 새로운 삶은 찾은 인물이다.
지난 4년 전까지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던 안씨가 정보화마을에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포항 기계면에서 가장 잘나가는 컴퓨터 교사가 된 것. 이 때문에 안씨는 도내 정보화마을 성공 수기에도 당선되기도 했다.
“어렵게 배운만큼 열성적으로 가르치고 싶어요. 특히 이주여성들은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척척 알아듣고 곧잘 따라하지요.”
안씨는 주중에는 매일 9시에 마을정보센터로 출근해 오후 5시 퇴근할 때까지 정보화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수요일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동안은 특별히 이주여성들을 위한 컴퓨터 교육시간이다.
안씨는 지금은 한글자판을 연습하고 있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지면 인터넷 검색, 문서작성, 홈페이지 제작 등 조금 어려운 과정으로 들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컴퓨터 교육은 한글을 익히는 좋은 도구입니다. 인터넷에서 친구도 만나고, 한국문화도 배우면서 한국사회에 하루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봅니다.”
안씨는 “컴퓨터를 배우려는 이주여성들의 열성만큼 남편이나 친척, 이웃 등 주변 분들의 적극적인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주여성 정보화교육 봇물
국제결혼 이주여성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이유는 최근 지자체마다 도시 이주가 가속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농촌공동화 현상을 해소하는 동시에 농촌 총각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들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농촌 남성의 국제결혼은 지난 2004년 1800건에서 2005년 2900건으로 60% 정도 늘었고, 지난 2005년 한 해 동안 농업 종사자 가운데 36% 정도가 외국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처럼 이주여성이 급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부나 지자체는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에 대해 손을 놓고 있었다.
최근 들어 농림부가 올해부터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국내 정착을 돕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지자체도 교육기관과 손을 잡고 교육에 나섰다.
경북도와 전남도도 최근 한국디지털대학교와 MOU를 교환하고 경북 구미시, 전남 담양군을 시범지역으로 선정,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활용법 등 정보화 교육과 한국어 온라인 교육인 ‘다문화가정 e-배움 캠페인’을 실시하기로 했다.
전북 장수군도 최근 결혼 이주여성가족 문화교실을 열고 지역 120여명의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글과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외 전국의 지자체마다 이주여성들을 위한 정보화교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경북도는 올해부터 전국 정보화마을 정보교육센터를 활용, 매주 한 차례씩 한글 및 컴퓨터 교육을 시작해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 도내에서 각 지역 이주여성들이 컴퓨터와 한글을 배울 수 있는 마을정보센터는 85곳에 이른다.
포항=정재훈기자@전자신문, j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