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문화산업’이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현실과 미래를 모두 담보할 정책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현재는 껍데기가 화려하되 알맹이는 비참하다. 실제로 ‘한류’가 흥겹지만 연예기획사와 연예인 간 노예계약이 만연하다.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에 맞서 독보적인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지만 제작 인력들은 도제식 제작시스템 아래에서 생활고에 시달린다. 불안한 미래에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 정책적 시선이 ‘문화산업을 창달할 사람이 누구인지’에 집중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문화예술인 기본통계 신뢰도’조차 낮다. 특히 디지털 콘텐츠는 IT 프로슈머(사용자) 등에 올라타 인터넷을 통해 황새걸음으로 내달리지만 저작권법과 같은 정부 정책은 뱁새걸음이다. 한미FTA를 계기로 문화산업 유통구조가 완전한 시장개방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이 겉도는 정부 정책을 추스를 최적의 시점이다.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놀이’의 하나로 치부됐던 게임·애니메이션·영화·음악 등은 이제 괄목할 성장 산업이다. 특히 IT를 매개로 아날로그 환경에 놓여있던 이러한 콘텐츠가 디지털 공간으로 유입되면서 문화산업이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각광받는다.
우리나라도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육성전략을 마련한 결과, 지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 동안 문화산업 매출이 연평균 10.5%씩 성장해 2005년 기준 53조9481억원에 달했다. 이는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 4.2%보다 2배 정도 높은 것으로, 문화산업 위치가 확고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하지만 2005년 문화산업 매출액의 국내총생산(GDP) 기여도가 2.38%에 불과해 선진국 수준인 6∼7%대로 올라서기 위한 투자가 더 필요하다는 게 문화관광부 시각이다.
이같은 시각, 즉 외형(매출)에 주목하되 더욱 투자해 경제기여도를 높여야 한다는 정책적 판단은 지극히 단순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나눠놓은 채 사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정책에서 ‘온·오프 경계선’부터 지울 필요가 있다는 게 산업계 시각이고, 주요 정책 입안자들의 인식이다.
“문화산업계는 여전히 끈끈한 혈연과 학연이 주도한다. UCC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이되 공개되는 즉시 세계와 공유하는 체계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예술인 A씨의 고민이자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다. A씨는 자신과 친구들의 작품을 모아 인터넷에 개방하고 사업으로 발전시키려 한다. 문화예술 콘텐츠를 자유롭게 감상하고 쉽게 거래할 수 있는 인터넷 광장(e마켓플레이스)을 마련하겠다는 것. 하지만 UCC 등을 ‘수입(저작권료)을 줄이는 천덕꾸러기’로만 받아들이는 일부 문화예술인들의 인식이 A씨의 앞을 막아서는 큰 장벽으로 섰다.
IT 혁명 이후 먹거리는 지적기반의 문화산업이며, 그 문화산업은 우리나라가 필연적으로 추구해야 할 핵심 성장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이 분출한다.
창업투자회사인 바이넥스트창투의 박재민 부장은 “정부 차원에서 문화산업에 종잣돈이 투입되지 않으면 펀드 조성이 힘들다”며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를 유도할 다양한 정책의 선행”을 바랐다.
긴 호흡에 기반한 정책 수립 요구도 있다. 김일호 오콘 사장은 “(문화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이니만큼 참을성을 가지고 세세한 지원 정책을 세워서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며 “정권이 바뀐다거나 단기간에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접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적어도 30년을 투자하겠다는 생각으로 가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로 시선을 넓히자는 얘기도 나온다. 고정민 삼성경제연구소 팀장은 “국내 문화산업시장은 규모에 한계가 있어 해외로 진출하지 않으면 모멘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분출하는 요구들은 정책 안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투자대비효과’에 집중하고 ‘매출성장률’을 자랑하려는 과거형 정책으로는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할 것이다.
우선 ‘접점’에 주목하자는 지적이다. 가장 중요한 접점은 문화예술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이. 문화 창작물을 세계로 매개할 IT에 주목하자는 얘기다. 도시·농촌·나이·직업 등 공간과 계층적 장벽을 IT로 무너뜨린 뒤 ‘새로운 문화산업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이 공간을 기반으로 문화예술인 정보 데이터베이스부터 구축하고, 될성부른 문화예술 인재를 발굴·육성하는 등 세세하게 침투해가는 정책과제를 수립할 때다. 이후 민간 투자 증대, 한국산 콘텐츠의 세계화 등은 시장흐름이 결정할 것이다.
◆기고-다수가 분점하는 문화권력
:이호영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 ehoyeong@kisdi.re.kr
할리우드에서 아무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아 자신의 집에서 네티즌을 향해 연기를 펼쳤던 세 명의 친구들. 이들의 자작 영상물은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끌며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결국 전문 연기자가 됐고 방송에 출연했다. 론리아일랜드(thelonelyisland.com)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예전이라면 주류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인터넷 덕택에 성공한 이야기는 닷컴 열풍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환갑을 바라볼 때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한 연예인이 생애 최초의 팬미팅을 가져 화제가 됐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인정 역시 네트워크를 통해 모이면 외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지금까지 배타적 문화권력을 향유해왔던 이들에게 IT는 어떤 의미에서 위협적일 수 있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경제적·정치적으로 우위에 선다는 것 외에도 소통의 수단과 방식을 독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터넷의 보급으로 하나의 현상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이 경쟁하게 되었으며, 주류의 인정이 아닌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의 인정을 추구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들은 지역사회에서는 소수이지만 전국적·지구적으로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한편 나에게서 멀리 있고, 내게 오게 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정보·지식·문화는 이제 네트워크 위에 있고, 내가 찾아낼 능력만 있다면 내 소유나 다름없게 되었다.
크리스 앤더슨은 저서 ‘롱테일’(The Long Tail)에서 20%의 히트상품에 주력하는 희소성의 시대가 가고 오프라인에서 잊혀졌던 틈새 상품들이 제 주인을 찾아가는 풍요의 시대가 오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변화의 근저에는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는 비용이 극적으로 줄어들게 한 검색기술이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수요 자체가 획일적인 사회에서 경쟁력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문화 경쟁력을 논하기 전에 문화의 다양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급속한 산업화 단계에서 한국 사회는 강력한 중심지향성을 갖고 발전해왔다. 정보화는 우리 사회를 보다 다양한 문화에 대해 포용력을 가진 사회로 만들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 많은 재기발랄함과 창의성으로 무장한 이들이 왜 오프라인에서 좀 더 많은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열기에는 수직적 소통구조를 뚫고 나오고 싶었던 이들의 욕망이 숨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품과 콘텐츠를 연결하고 자유롭게 검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80%에 해당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연결해 창의 경제의 밑거름으로 삼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인터넷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마이너리티, 이들에게서 내일의 희망을 읽는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