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아무리 잘나도 혼자서 성공할 수 없듯이 로봇 세상에도 독불장군은 없다. 로봇이 가정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주변 환경(주택)부터 로봇활동에 적합한 요건을 지원해야 한다. 요즘에는 주택을 설계할 때부터 로봇투입을 미리 고려한 ‘빌트인(built-in) 로봇’ 시장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집과 로봇은 하나의 상품이다.’
주택시장에서 빌트인 형태로 로봇을 보급하는 수요가 늘고 있다. 신규주택을 분양하면서 가구와 주방기기, 가전제품을 붙박이로 끼워서 재미를 본 건설회사들이 새로운 차별화 포인트로 지능형 로봇에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빌트인은 본래 수납장을 벽 속에 넣는 형태로 실내공간을 넓게 쓰려는 유럽식 주거문화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빌트인이란 사치스런 상류계급의 세간살이를 통칭하는 용어처럼 쓰이고 있다. 새 집에 붙박이로 내장된 냉장고, 세탁기, 주방기기, 가구를 보면 시각적으로 매우 조화롭고 공간활용에도 유리하다. 이처럼 주택의 가치를 한단계 높이는 빌트인 시장에 로봇이 뛰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빌트인 로봇시장의 장점=요즘 지능형 로봇업체들은 아파트 건설사와 손잡고 빌트인 로봇제품을 공급하는 경쟁에 나서고 있다. 로봇업체들이 빌트인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가장 큰 이유는 대규모 신규 아파트단지를 확보하면 수천세대의 로봇수요가 한꺼번에 쏟아지기 때문이다. 마이크로로봇은 지난해 대전 유성(168세대)과 경기도 용인 CJ나인파크(198세대)에 이어 최근 포항의 신규 아파트 3000세대에 청소로봇 납품계약을 체결해 빌트인 로봇시장에 물고를 텄다. 아파트 전체 단지에 동일한 로봇이 깔리면 제조사 입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는 것 외에도 유리한 점이 많다. 아파트를 설계할 때부터 로봇제품의 성능과 활용도를 미리 고려하기 때문에 비싸게 구매한 청소로봇이 문턱에 걸려 꼼짝 못하거나 벽장 구석에서 헤매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실내에서 청소로봇의 위치인식을 위해 천정과 바닥, 벽면 등에 센서를 별도로 설치하는 불편도 사라지게 된다. 건물의 시공단계에서 거주자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장판 밑이나 전등갓 속에 위치센서를 장착할 수 있다. 청소로봇을 쓰지 않을 때는 벽 속의 로봇수납공간에 들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스텔스 인테리어도 가능하다.
즉 주택구조에 맞춰서 개발된 빌트인 로봇은 개인이 단품으로 구매한 로봇보다 신뢰성과 활용도면에서 몇 단계 높아진다. 한번 빌트인 로봇이 보급되면 제조사가 차후 새로운 로봇제품, 기능을 추가로 업그레이드하기도 용이하다. 또 실내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 덕분에 빌트인 로봇은 기존 로봇제품에 비해 마진도 짭짤한 편이다. 에이스로봇의 한 관계자는 “중소 로봇업체 입장에서 빌트인은 무조건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시장”이라며 하반기 중에 주요 건설사와 제휴를 성사시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건설사, 홈네트워크 업계의 동향=빌트인 로봇은 주요 건설사 입장에서도 저비용으로 고객을 끌어들이는 유망 아이템이다. 수억원이 넘는 아파트 분양에서 로봇 한대를 끼워서 파는 부담은 미미하다. 반면 부진한 아파트 분양률을 높이도록 주부들의 마음을 끄는데 가사일을 돕는 로봇은 매우 효과적이다. SK건설의 문재형 부장은 “홈네트워크의 부가서비스로 빌트인 로봇이 연동할 경우 아파트 고객의 만족도가 크게 높아질 것으로 판단한다”면서 SK텔레콤과 함께 휴대폰으로 제어되는 로봇+홈네트워크 기술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건설업계 1위인 대우건설도 서울통신기술, 유진로봇과 함께 로봇기반의 아파트 건설에 협력하기로 최근 합의한 바 있다.
홈네트워크업계도 빌트인 로봇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 홈네트워크업체 르네코의 한 관계자는 “로봇이 홈네트워크 제어판(월패드) 역할을 대체하면 거주자들이 실내 어디에 있든지 로봇이 따라와 집안을 콘트롤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제 주택시장에서 로봇이 홈네트워크 기술과 만나 "로봇 가정부"로 재탄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정부가 빌트인 로봇 끌어야=유망해 보이는 빌트인 로봇시장이 본궤도에 오르려면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로봇단품의 기술향상이 아니라 거대한 주택시장이 로봇기술을 새롭게 수용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산자부는 건축법 시행령을 개정해 가정내 로봇의 활동을 위해 주택내 방화구역설치를 일부 완화하거나 각 세대마다 로봇설치공간을 의무화하는 방안까지 고려 중이다. 이같은 구상이 현실화되면 매년 공급되는 40만 세대 신규 아파트 대부분은 빌트인 로봇투입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정통부는 공공주택이 홈네트워크 인증을 딸 때 홈모니터링 로봇의 설치유무를 평가기준으로 허락해 정책적인 로봇수요창출에 동참하고 나섰다. 과거 초고속 인터넷과 홈네트워크 대중화가 그러했듯 빌트인 로봇도 정부의 정책적 비전제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빌트인 로봇의 미래=인구 절반이 아파트에 사는 한국의 주거문화는 좀 삭막하지만 빌트인 로봇시장을 육성하는데 이상적 조건이다. 이처럼 로봇활동에 최적화된 주거환경에서 로봇은 기대치를 넘는 성능을 발휘하면서 인간을 도울 수 있다. 빌트인 로봇의 가장 두드러진 기술적 장점은 시공사가 미리 벽, 바닥, 천정 등에 설치한 좌표센서로 차량용 내비게이션처럼 정확한 주행경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냉장고 밑에 들어가 음료수나 과일을 꺼내 주인에게 운반하거나 식기세척기에 빈 그릇까지 집어넣는 ‘로봇쟁반’의 등장도 가능하다. 또 거주자의 감성변화와 활용도에 따라 소파, 침대, TV가 스스로 위치를 이동하는 로봇가구가 나올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새로운 빌트인 로봇제품의 최대 수혜층이며 경제적 파급효과도 광범위할 것이다. 사람이 사는 집이 로봇시스템처럼 변해가는 트렌드 속에서 로봇과 건축이 융합하는 빌트인 로봇시장의 도래는 필연적이다.
◇인터뷰-김경근 마이크로로봇 사장.
“로봇은 앞으로 집을 짓는 건축의 기본요소가 될 겁니다.”
마이크로로봇의 김경근(47)사장은 한국형 빌트인 로봇의 선구자다. 지난 2004년 김사장은 마루바닥에 바코드를 인쇄해 청소로봇의djs 위치정밀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특허기술을 개발했다. 문제는 청소로봇이 정확한 위치인식을 하려면 바코드가 새겨진 전용 바닥재를 반드시 시공해야 한다는 것. 어느 집주인이 단지 로봇청소기를 위해서 멀쩡한 바닥재를 교체하겠는가. 하지만 김사장은 포기하지 않고 한화종합화학과 제휴해 바코드 바닥재를 만들고 신규 아파트시장을 부지런히 두드린 결과 최근 큰 성과를 거뒀다. “포항의 신규 아파트 3000세대에 청소로봇+바닥재를 납품하게 됩니다. 로봇이 빌트인 시장에 대규모로 들어간 세계최초의 사례죠.”
그는 또 미래의 집은 로봇도 활동하기 편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편안이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이상적인 빌트인 로봇은 평소에는 우렁각시처럼 숨어있다가 필요할 때만 나오는 주택구조가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빌트인 로봇시장이 궤도에 오르려면 민간업체의 노력과 함께 정부의 정책적 의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택시장에서 로봇을 채택할 때 어떤 혜택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구요”
김사장은 최근 대형건설사들이 로봇과 홈네트워크를 연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 빌트인 로봇시장이 폭발적인 성장기로 접어들 시기가 머지 않았다고 전망한다. “로봇도 사람처럼 주변 환경이 받쳐줘야 제 실력을 발휘합니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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