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산업용 로봇의 보급대수에서 세계 4위의 로봇대국이다. 하지만 로봇한국의 실상을 뒤져보면 자동차, 전자 등 일부 대기업들의 산업용 로봇수요가 90% 이상이고 여타 중소업체의 로봇보급은 극히 낮은 편중현상이 심각하다. 이 때문에 중소업체의 자동화를 돕는 신개념의 산업용 로봇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례1= 휴대폰 부품을 제조하는 모 중소업체의 P 사장은 요즘 생산라인의 중국이전 문제로 고민이 많다. 웬만하면 국내서 공장을 돌리고 싶지만 좁쌀만 한 부품을 조립하는 수작업 공정을 대부분 자동화하지 않고는 중국 경쟁사들의 저가공세를 따돌릴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자동화 라인을 설치할 형편도 아니다. 또 수시로 바뀌는 휴대폰 모델 체인지에 작업공정을 맞추려면 복잡한 기계보다 사람 손이 훨씬 속편하지 않은가. “이번 기회에 칭따오로 공장을 옮겨버릴까” P 사장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례2=창원의 기계부품업체 A사는 최근 기술자들이 잇따라 회사를 그만 두면서 심각한 생산차질을 겪고 있다. 정확한 형상에 따라 알루미늄 주물을 만들고 다듬는 이 회사의 생산공정은 자동화가 쉽지 않아 수작업에 거의 의존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주물가공이 3D작업으로 간주되는 탓에 요즘에는 일하려는 사람을 구하기도 여의치 않다. 급한 대로 임시직 노동자를 투입했지만 품질은 고사하고 언제 그만 둘지도 미덥지 못한 형편이다. “어디 믿을 만한 기술자 구할 데 없나” A사의 공장장은 한숨을 쉰다.
산업용 로봇의 출발은 대기업의 공장자동화(FA)를 지원하는 도구로 시작됐다. 지난 1962년 세계 최초의 산업용 로봇이 투입된 장소도 거대 자동차기업 제너럴모터스(GM)의 뉴저지 공장이었다. 초창기 산업용 로봇은 지금보다 훨씬 더 비싸고 운영하기도 까다로운 장비였다. 당연히 대규모 생산라인과 로봇전문인력을 동시에 갖춘 대기업만이 로봇팔이 즐비한 자동화 생산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지난 90년대에 세계 산업용 로봇시장의 성장률이 크게 떨어진 배경에는 대기업 위주의 편향된 로봇수요가 영세한 중소업체로 대중화되지 못한 탓이 컸다. 좁은 작업공간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을 해야 하는 중소업체 입장에서 산업용 로봇장비는 너무 복잡하고 비용도 높다. 수시로 바뀌는 작업을 위해 로봇장비를 새로 프로그램하느니 차라리 수작업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진국의 중소업체 대부분이 인건비 상승과 노령화, 3D기피 풍조에 따른 인력난으로 제조업 공동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 만약 산업용 로봇이 대기업 편중을 벗어나 대중화의 길에 들어서려면 개발단계에서 중소업체의 작업환경을 먼저 고려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이처럼 산업용 로봇을 중소기업의 눈높이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사회구조의 노령화가 완연한 유럽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
◇유럽의 SME로봇= EU당국은 지난 2005년초 기존 산업용 로봇의 패러다임을 뒤바꿀 ‘중소기업(SME:Small and Medium sized Enterprises) 로봇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SME로봇은 격리된 생산라인에서 혼자 정해진 일만 수행하는 기존 로봇장비와 달리 작업자와 같은 공간에서 공동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U는 인간공조형 로봇을 지역 내 22만개 중소업체에 보급해 인력난 해소와 근로환경을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SME로봇과 기존 산업용 로봇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새로운 작업을 지시할 때마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입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로봇팔의 끝을 잡고 한번 시범을 보이면 SME로봇은 작업순서와 궤적, 힘의 강도까지 그대로 재현한다. 작업자 옆에서 SME로봇팔이 돌아가도 안전센서 덕분에 부딪힐 염려도 없다. 심지어 사람의 육성과 제스처로도 로봇제어가 가능하다. 또 로봇부품을 전부 모듈화시켜 비숙련자도 쉽게 설치, 보수할 수 있고 가격대도 기존 산업용 로봇보다 저렴하다. 스펙대로 개발된다면 중소업계가 꿈꿔온 이상적인 자동화 생산설비, 산업용 로봇 2.0이 등장하는 셈이다. 독일 프라운호프 IPA가 주관하는 SME로봇 프로젝트는 오는 2009년까지 약 300억원을 투입해 무거운 기계부품을 옮기거나 조립, 용접, 디버링까지 수행하는 다양한 SME로봇제품을 상용화하게 된다. 이 사업에는 ABB·COMAU·KUKA 등 유럽의 24개 기업과 학교기관이 참여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또 독일의 대기업 BMW는 당장 내년부터 자동차제조에 중량물 이동용 SME로봇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한국형 중소기업로봇의 개발현황=EU가 제시한 SME로봇은 국내 로봇업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업용 로봇시장이 레드오션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중소업체를 통한 새로운 로봇수요의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기계연구원과 한국공작기계협회는 중소업체의 인력난 해소와 산업용 로봇시장의 저변확대를 목표로 중소업체들을 위해 인간공조형 산업용 로봇을 업계 공동으로 개발할 방침이다. 한국기계연구원 지능형정밀기계연구본부의 경진호 박사팀은 지난 연말부터 중소제조업체와 로봇업체 20여곳을 방문해 자동화 수요를 분석한 결과 SME로봇사업의 타당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기계연구원은 올해 1월부터 자체 기본사업으로 사람과 협력작업을 하는 산업용 로봇개발을 위해 △인간의 양팔 작업을 흉내낸 듀얼암 로봇과 △고자유도의 5축가공이 가능한 병렬형 로봇 △600kg을 핸들링하는 중량급 로봇팔 등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용 로봇분야에 기반기술이 충분하기 때문에 국내 중소기업이 필요로 하는 로봇장비는 오는 2010년 이전에 대부분 상용화가 가능할 전망이다. 다만 국내 로봇산업이 SME로봇이란 블루오션을 찾으려면 정부, 로봇업계의 적극적 참여와 함께 중소기업인 스스로 로봇자동화수요를 발굴하고 경쟁력 향상에 의지를 가져야 한다.
박희태 공작기계협회 이사는 “로봇은 앞으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국내서 로봇이 필요한 제조업분야 중소기업수가 11만개에 달하는데 SME로봇 개발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평가했다.
◇인터뷰-한국기계연구원 지능형정밀기계연구본부 경진호 박사
“평소 중소업체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인력난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유럽의 SME로봇계획을 보고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기계연구원의 경진호 박사(45)는 요즘 SME로봇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대전, 창원 등 지방 중소기업을 돌아다니며 한국형 SME로봇이 어떤 분야에서 필요한지 직접 파악하고 있다.
그는 “국내 산업용 로봇시장이 지나치게 대기업 위주로 편향되어 대부분 중소기업들은 자동화의 사각지대에 방치됐다”면서 새로운 개념의 산업용 로봇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경박사는 “국내 중소기업의 인력난과 제조업 공동화의 유일한 해결책은 SME로봇기반의 자동화 투자”라고 믿는다. 기업들이 다품종 소량생산체제에 적응하려면 기존 산업용 로봇의 경직된 시스템으론 역부족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SME로봇의 조기활성화가 침체된 산업용 로봇시장에도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SME로봇은 기존 산업용 로봇보다 잠재수요가 훨씬 크기 때문에 모터, 감속기 등 로봇핵심부품을 제조하는 국내 부품업체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금 산업용 로봇시장은 경쟁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레드오션입니다. 하지만 SME로봇은 아직 유럽에서도 상용화가 안된 시점이라서 한국이 새로 진출하기에 적합한 상황입니다.”경박사는 SME로봇 사업에 관심이 있는 산학연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산업용 로봇의 두번째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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