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통합구매의 그늘

 국내 x86 서버업계가 가혹한 ‘마법의 덫’에 걸렸다. 매년 역대 최고 판매 대수를 경신하고도 매출은 제자리걸음이다. 영업 이익은 더욱 방어하기 힘들다. 벌써 몇년째다. 서버 프로세서는 32비트에서 64비트로, 듀얼코어에서 쿼드코어로 발전하는 데도 말이다. 그래서 기술이 시장을 창출한다는 말은 옛말처럼 들린다. 그만큼 단가하락이 극심하다는 얘기다.

 “서버 1대 팔아서 택배비도 안 나오는데, 설치는 어떻게 하고 유지보수는 어떻게 합니까? 올해부터는 서버 사업 비중을 획기적으로 줄이려고 합니다.” 중견 서버 유통업체의 한 CEO가 ‘고백한’ 올해의 경영 방침이다.

 서버업계의 이처럼 가혹한 ‘마법’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우선, 대기업 통합구매 열풍이다. 1∼2년간 물량을 보장해주는 대신 단가를 파격적으로 낮춰 구매하는 방식이다. 금융권에서 불기 시작한 통합 구매 열풍은 이제 통신과 자동차·포털업체로 번져나가고 있다. 통합 구매에서 브랜드나 영업 로열티는 없다. 낮은 가격만 있을 뿐이다. 국민은행이 델에서 HP로, 현대자동차가 IBM에서 HP, 다시 IBM으로 더 낮은 가격을 찾아 매년 공급선을 갈아타고 있다.

 그렇다고 중소기업에에서 나오는 서버 수요도 많지 않다. 이것이 두번째 이유다. “이 때쯤이면 중소기업군 수요들이 매출을 탄탄히 받쳐줘야 하는데 없어요.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불황인 것 같습니다.” 서버 판매량만 봐도 경기 지표를 느낄 수 있다는 서버 공급업체 임원의 말이다.

 더 무서운 것은 국내 제조 산업의 공동화 현상이다. 대기업·중소 제조업체 할 것 없이 주무대를 해외로 이전하니 국내 시장은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제조업 공동화 효과가 서버업계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네요. 이 때문에 수출 기업보다는 유통과 통신 등 내수 기업 위주로 영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고 말하는 다국적 기업 임원의 말이 뼈아프게 들린다.

 그동안 서버업계는 불황을 ‘경기 탓’으로만 분석하며, 경기만 풀리기만을 기대해 왔다. 분석해 보면 꼭 경기 탓만은 아니다. 대기업 비용 절감 압박, 중소기업의 취약성, 제조업 공동화 등은 대한민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다. 구조적 문제의 파고를 넘는 곳만이 성장을 기대할 수 있으니 쉽지 않은 장사다.

류현정기자·솔루션팀@전자신문, dreams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