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혁명은 시작됐다]3부-로봇생태계를 만들자: ⑤리얼 세컨드 라이프

새로운 기술이 처음 발명한 사람의 예측대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에디슨은 축음기를 만들었지만 대중이 음악을 듣는 도구로 쓸 줄은 몰랐다. 공학계산을 위해 개발된 컴퓨터는 요즘 인터넷, 게임을 위한 오락도구로 더 애용된다. 어쩌면 로봇도 ‘자동화’란 초창기 컨셉트 때문에 더 큰 시장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거참 신기하네. 미국에서 우리 집 근처를 돌아다니다니” “그래 내 얼굴은 잘 보이는 거야”

 김진오 광운대 정보제어공학과 교수는 정말 오랜만에 부인과 함께 아파트 근처를 산책했다. 미국에서 대학에 들어간 큰 아이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하고 기러기 아빠가 된 지도 벌써 2년차. 퇴근 후 적적할 때면 수시로 가족에게 국제전화도 하고 메신저 영상통신도 해봤다. 그러나 마음 속 휑한 구석은 조금씩 커져만 갔다. 넘치는 재력을 갖춘 독수리 아빠처럼 매달 미국으로 날아갈 처지도 못 되지 않은가.

 생각 끝에 김 교수는 원격제어가 되는 영상통화 로봇(미디어 로봇)을 통해서 샌프란시스코의 부인 권희재씨와 국제 데이트를 시도해 봤다. 먼저 부인이 로봇전용 메신저로 접속을 하자 신반포 아파트 단지의 낯익은 풍경이 PC모니터에 뜬다. 키보드 방향버튼을 누르니 서울에 있는 로봇이 스르르 움직인다. 로봇카메라로 보는 주변 영상이 좀 어색했지만 부인 권희재씨는 로봇을 조종하는 요령을 금세 터득했다. “애들은 별일 없지” “그럼요, 어머 장미꽃이 벌써 지고 있네” 김 교수 부부는 신반포 아파트 단지를 거닐면서 간만에 데이트를 즐겼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아파트 밖으로 나가던 로봇이 갑자기 멈추면서 화면이 꺼졌다. 로봇에 영상신호를 보내는 와이브로 접속이 아직은 불안한 탓이다. 아무튼 로봇이 기러기 아빠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데 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임은 입증된 셈이다.

 김 교수는 이번 로봇 데이트를 가리켜 새로운 통신문화를 체험한 것 같다고 표현한다. 로봇과 거닐면서 마치 지구 건너편의 가족을 서울로 직접 데려와서 대화를 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미디어로서 로봇은 여타 통신매체(영상폰·PC)와 달리 접속자의 인격을 대체하는 상징적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을 모델로 만들어진 기계인 로봇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다. 덕분에 김 교수는 지구 건너편의 부인과 함께 가상세계가 아닌 실제 공간(아파트 단지)에서 함께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로봇기술이 무선 광대역 통신망과 결합하면서 그동안 사이버 공간에서나 가능했던 커뮤니케이션의 무한자유가 현실세계로도 확산될 조짐이다. 세계 통신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도 있는 이 신기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로봇이 만든 `통新세계`

 사람들은 몹시 바쁠 때 “정말 몸이 두개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비록 몸뚱이는 하나지만 여러 장소에서 각각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인생은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 아닌가. 이처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삶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끊임없이 갈구해온 꿈이다.

 요즘 통신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현실세계에선 불가능했던 꿈을 가상공간에서 실현하기 시작했다. 요즘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끄는 세컨드라이프(secondlife.com)가 그 대표적 사례다. 지난 2003년 린든 랩이 창조한 세컨드 라이프는 현대인들에게 지금의 복잡한 삶을 버리고 가상사회에서 또 다른 인생을 살도록 돕는다. 실생활과 마찬가지로 세컨드라이프에서는 직장을 다니고 쇼핑을 하며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가상의 가정을 새롭게 꾸리거나 가상의 학교에 등교하고 심지어 아기도 가질 수도 있다. 가정과 직장을 쳇바퀴처럼 도는 현대인에게 비록 가상공간일지라도 삶의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는 세컨드라이프는 매력적이다. 올해 들어 전 세계 가입자 500만명을 돌파한 세컨드 라이프는 사회적 단점도 뚜렷하다. 영화 ‘매트릭스’처럼 현실과 가상세계의 영역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사회 부적응자들의 도피처가 되고 있다는 일부 비판도 있다 .

 반면에 로봇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사용되면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세계서도 삶의 영역을 얼마든지 넓힐 수 있다. 서울에 사는 미술교사 김모씨가 파트타임으로 도쿄의 한 미술관에서 한국 관광객들의 안내 가이드(로봇)를 맡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원격로봇을 이용해 파리의 샹젤리제와 뉴욕의 명품거리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싹쓸이하는 쇼핑원정대도 등장할 것이다. 예컨대 통신용 로봇과 무선 광대역 접속이 가능한 장소라면 지구상 어디라도 네티즌의 물리적 활동공간이 될 수 있다. 이는 인류가 숙명으로 간주해온 지리적 제약을 뛰어넘어 현실세계서도 대인관계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로봇이 만드는 새 통신세상은 가상공간의 세컨드라이프와 정반대 개념으로서 ‘리얼 세컨드 라이프’(Real Second Life)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파급효과

 우선 자식교육 때문에 헤어져 지내는 현대판 이산가족의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로봇기반의 가상현실(리얼 세컨드 라이프)은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 조기유학간 아들과 서울의 부모가 로봇을 통해 함께 산책을 하거나 쇼핑을 하는 상황도 가능해진다. 한국의 아빠가 캐나다에 있는 가족과 오붓하게 로봇기반의 생일파티를 열거나 모바일 로봇을 통해 자녀의 졸업식을 참관할 수도 있다. 참고로 기러기 아빠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10만명에 달한다는 추산이다.

 기업경영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관리자가 원격로봇을 이용해 지방, 해외지사를 수시로 둘러볼 수 있어 조직관리능력이 크게 강화될 것이다. 당연히 사업상 목적으로 오가는 교통수요와 시간, 비용도 그만큼 줄어든다. 재택근무자의 활동영역이 비약적으로 확대된다. 집 안에 앉아서도 지방공장의 생산라인을 점검하고 외국 전시회도 참관할 수 있다. 회식이 있거나 인간적 교분을 쌓아야 할 때가 아니면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점차 드물어진다.

 통신업계는 예상치 못한 트래픽 증가를 누리게 될 전망이다. 기러기 아빠가 원격로봇으로 미국에 있는 딸아이의 숙제를 도와주려면 기존 메신저보다 훨씬 고해상도의 영상정보가 필요하다. 또 원격로봇의 야외 활동을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와이브로, HSDPA와 같은 무선 광대역망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리얼 세컨드라이프가 정착되면 ‘와이브로+로봇 패키지’는 새로운 한류상품으로 해외수출에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된다.

 각국 정부는 출입국 제도를 무력화하는 리얼 세컨드 라이프의 확산에 따른 대응조치로 고심할 것이다. 외국인이 원격로봇에 접속해 자국 영토를 생활공간으로 삼는 경우 그 물리적 실체(로봇)를 불법 입국자로 간주할 것인가? 특히 보안당국은 테러분자들이 원격 로봇망을 휘젓고 다니며 공격을 할 가능성에 대해 기겁을 할지도 모른다.

 유통업계는 로봇기반의 전자상거래, 이른바 R-커머스라는 변화를 겪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객이 원격로봇을 통해 오프라인 매장을 둘러보며 제품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흥정을 해야할 상거래 분야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미디어 로봇과 무선통신망의 결합은 막대한 신규 로봇수요를 창출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새로운 통신매체로서 로봇기술의 잠재력이 무시된 주된 원인은 기계적 관점으로만 로봇을 이해하는 로봇공학계의 고정관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