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는 영국과 미국에서 비디오 게임의 폭력성이 도마에 올랐다.
한 비디오 게임이 출시 20여 일을 앞두고 사상 처음으로 영국에서 유통금지 조치를 당했고 교회와 게임기 제조업체와 극심한 대립도 전개됐다. 게임 중독에 대한 의학계 차원의 연구도 본격화하면서 게임 산업에 대한 사회 여론도 동요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는 온라인 게임 분야 종주국. 최대 게임 수출 지역으로 꼽히는 영미 지역에서 이슈로 떠오른 이 해묵은 논쟁을 방관하기는 어려운 입장이다.
◇‘영국발’ 비디오 게임 폭력성 논란=게임 폭력성과 중독성이라는 논쟁이 증폭된 진원지는 영국이다. 영국 영화등급위원회(BBFC)는 록스타게임스가 개발하고 테이크2인터랙티브가 유통하는 ‘맨헌트(인간사냥)2’에 대해 판매금지 조치를 내렸다. 84년 BBFC가 출범한 이래 첫 판금 결정이다. 록스타게임스가 개발한 맨헌트2는 정신병동을 탈출한 정신병자가 자신을 가둔 사람을 찾아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BBFC위원장인 데이비드 쿠크는 “우리도 판매금지 조치보다 장면 수정 권고 조치를 선호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판매금지 말고 다른 처분은 불가능했다”면서 “살인을 조장하는 가학성과 잔혹함이 어린이는 물론 어른한테도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영국 맨체스터 성당은 게임기 제조업체 소니와 얼굴을 붉혔다. 소니가 발매한 비디오게임 ‘레지스턴스:더 폴 오브 맨’에서 맨체스터 성당을 배경으로 한 총격 장면이 등장했기 때문. 맨체스터는 ‘지식재산권’이라는 개념까지 등장시키며, 소니 측에 재발 방지 노력과 기부금을 요구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도 “소니와 같은 거대 기업은 지역 사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책임감이 필요하다”면서 성당 측을 지지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소니 측은 일단 맨체스터 성당 이미지를 무단사용했다며 사과에 나섰다.
세계 최대 게임 퍼블리싱 업체인 EA는 게임 광고 때문에 수난을 겪었다. 영국에서 폭력을 부추기는 게임 이미지 광고가 문제가 되면서 방영 불가 판정을 받았다. EA 측은 즉각 광고 수정에 나섰다. 이번에 논란이 된 사건들은 최근 한달 사이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언론들이 이를 앞다퉈 보도하면서 게임 부작용에 대한 사회적 여론도 크게 환기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인가, 이윤 극대화를 위한 방편인가=맨헌트2는 영국에서 처음 논란이 된 후, 아이랜드와 이탈리아에서도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다. 현재로서는 미국에서도 유통이 힘들어 보인다. 미국 엔터테인먼트소프트웨어등급위원회(ESRB)도 맨헌트2에 대해 성인 등급(Adult Only)을 내리자 게임 및 게임기 공급업체인 소니와 닌텐도가 플레이스테이션2와 위가 청소년을 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성인 등급 게임에 대해서는 유통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개발사 측도 오는 10일로 예정돼 있었던 게임 발매를 무기한 연기했다.
맨헌트2로 논란의 중심이 된 록스타 측은 “맨헌트2는 심리적 공포물, 스릴러”라면서 등급위원회의 조치에 유감을 표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공포 영화 ‘쏘(Saw)’를 거론하며 “영화는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고, 게임은 안되는지 그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 미국 게이머도 뉴스 댓글에서 “문화는 현실의 반영”이라면서 “폭력적인 현실이 존재하는 한 현실을 반영한 게임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비디오 게임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 학부모로 추정되는 한 네티즌은 “게임사는 표현의 자유라고 하지만, 더 자극적인 소재로 돈벌이에 나서는 악순환에 게임업계가 빠져있는 것은 아니냐”고 지적했다.
텔레그래프 등 영미 언론들도 “이번 논란으로 가장 큰 수익을 얻은 업체는 록스타 스스로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엄청난 홍보 효과로 게이머의 기대 심리를 높여 놓았다는 분석이다. 전문가 중에서는 실감나는 게임일수록 위험하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특히, 닌텐도 게임기 ‘위’는 실감나는 게임을 위해 진동 컨트롤러를 제공하고 있는데, 맨헌트2와 같이 살해 장면에 이용될 경우 모방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미국의사협회 ‘정신질환’ 분류 고심=무엇보다 비디오 게임이 출시된 지 30년 만에 게임 중독을 정신질환으로 구분하려는 미국 의학계의 움직임도 일어났다는 점이다.
지난달 29일 연례회의에서 미국의사협회(AMA)는 비디오 게임 중독을 정신질환으로 명시하고 미국정신의학계의 정신질환 진단표와 통계매뉴얼에 포함시킬 것을 집중 검토했던 것. AMA 조사 결과, 미국 청소년 90%가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있으며 500만명(약 15%)이 중독성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월드오브워크래프트’와 같이 온라인게임의 중독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단 AMA는 게임 중독을 정신질환으로 구분하는 부문에 대해서는 좀더 장기 연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미국의학협회는 “게임중독이 미치는 개인 건강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경우) 94년 이후 한번도 개정되지 않은 게임등급시스템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록스타는 어떤 게임사인가
게임 개발사인 록스타게임스는 미국 거대 게임 퍼블리싱 업체 테이크투인터랙티브의 자회사다. 게임 폭력성 논란이 일 때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회사다. 테이크투는 유망한 게임 개발사를 다수 인수한 후 록스타 리즈·록스타 링컨 등 록스타라는 브랜드로 통일, 관리하고 있다.
테이크투가 보유한 개발 스튜디오 중 가장 유망한 곳이 록스타 노스다. 80년 대 설립된 스코트랜드의 작은 게임 개발사 ‘DMA디자인’이 전신. 90년대 말부터 비디오 게임 ‘그랜드오토데프트(GTA)’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 게임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장 이상 판매됐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X박스360 시장 확대를 위해 GTA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MS는 GTA 차기작의 온라인 콘텐츠 독점공급권을 확보한 대가로 테이크투 측에 무려 5000만달러(약 460억원)의 계약금을 제공키로 했다. 그러나, GTA는 마약·폭력·갱·범죄·살인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발매 때마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도 GTA 시리즈에 대해선 수년 동안 국내 유통을 금지했다가 지난해 12월에서야 유통을 허가했다. 당시 영상물 등급위원회에서 게임물등급위원회로 게임 심의 주무기관이 바뀌면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겠다는 상징적인 판결(성인등급)을 내린 것이다. 물론 이 게임의 폭력성과 반사회적 내용을 우려한 비판 여론도 여전하다.
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
◆세계 각국 게임심의기관 현황
◇한국=우리나라 게임등급 심사업무는 오랫동안 독립기관인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맡아왔으나, 지난해 10월부터 문화관광부 산하 게임물등급위원회로 전격 이관됐다. 게임산업진흥법에 따라 게임 심의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확보하자는 취지다. PC·온라인·모바일·비디오 게임물에 대해서는 전체 이용가, 12세 이용가, 15세 이용가, 청소년 이용불가 4개 등급으로 나뉘며 아케이드게임물에 대해선 전체 이용가와 청소년 이용불가 2개 등급으로 나뉜다. 등급분류 거부제도도 시행하고 있으며 등급 분류 거부시에는 7일 전 게임개발사에 통보해야 한다.
◇미국=민간 자율기관인 게임소프트웨어등급심의위원회(ESRB)가 게임 등급 심사를 맡는다. 게임을 등록하기 위해서 제작업체는 게임 내용을 설명하는 상세한 설문지를 작성해야 한다. 독립성을 갖춘 3명의 훈련된 등급위원들이 의견일치가 이뤄지면, 게임제작업체는 공식적인 분류등급을 받는다. 3세 이상가, 6세 이상가, 13세 이상가, 17세 이상가, 18세 이상(AO등급)가, RP(Rating Pending·등급보류)이다.
◇영국=독립기관인 영국영화등급위원회(BBFC)가 게임 등급 심사를 맡는다. 취학 전 아동가, 전체 이용가, 8세 이상 부모 보호 필요, 12세 이상 성인동반 필요, 12세 이상가, 15세 이상가, 18세 이상가, R18(성인숍)가 등으로 등급 구분이 상세한 것이 특징이다. 성인은 자유롭게 자신이 관람하고자 하는 영상물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만, 사회에 대한 잠재적 악영향은 지니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위원회의 기조다.
◇일본=민간 자율로 2개의 심의기관이 존재한다. 컴퓨터엔터테인먼트등급위원회(CERO)는 주로 비디오게임과 PC게임을 심의하는 데 전 연령, 12세 이용가, 15세 이용가, 18세 이용가 등 4개 등급을 판정한다. 일본어뮤즈먼트머신제조협회(JAMMA) 역시 회원사의 회비와 수수료로 운영되는 민간 자율기구로 아케이드 게임을 심의한다. TV게임기와 메달 게임기가 주대상. 메달 게임기는 아동용과 성인용으로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