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과학재단을 설립할 때 미국 공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과학기술재단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기초과학 육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로 ‘과학재단’이라는 이름을 고집했다.”-최형섭 초대 과학재단 이사장(전 과기처 장관)
“정부 예산 편성 기간만 되면 아침 7시부터 예산실에 달려가 청소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담당자를 만나 설명하고 끊임없이 설득했다.”-박진호 제9∼11대 과학재단 사무총장
당시 문교부와 경제기획원 등에서 공전하다 우여곡절 끝인 지난 77년 한국과학재단을 설립하고 오늘날의 규모로 키우는 초석을 놓은 과학기술계 원로의 말이다.
한국과학재단이 올해로 설립 30년을 맞았다. 한국과학재단이 설립 당시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배정받은 예산은 3억5000만원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해외 유치 과학자 주택 마련 기금으로 10억원이 더 나왔고, 이 자금이 오늘의 한국 과학기술을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됐지만 1조원이 넘는 지금의 규모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과학재단 설립 30주년을 맞아 기관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조망해 본다.
◇두뇌 유출 막으려 설립=한국과학재단은 지난 77년 5월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을 초대 이사장으로 서울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내에서 출범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출범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과학재단은 지난 60년대 말 국내 30여개 대학이 이공계 대학 과정을 개설하고 매년 3300여명의 학사 인력을 배출했지만 석·박사 과정은 해외에서 이루어져 심각한 두뇌 유출 현상이 빚어지면서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53년부터 72년까지 20년간 해외 유학생 누계가 5700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는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쉽게 만들어지는 조직이 없듯 당시에도 문교부와 경제기획원을 오가며 갖은 고생 끝에 관련 법부터 만들어지게 된다. 과학기술자의 연구 활동 지원과 대학원 교육의 질적인 향상, 기초 및 응용과학 연구 지원 등을 목적으로 지난 76년 한미공동자문단이 구성되고, 본격적인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지난 78년부터 99년까지 국제협력사업본부장을 맡아 았던 이무남씨는 “과학재단 설립에 관한 자료 파일을 들고 여관에 틀어박혀 한달 동안 작업한 기억이 난다”며 “최형섭 초대 이사장은 재단 설립의 산파역, 최순달 이사장은 재단의 대전 이전과 하드웨어 구축, 박진호 총장은 예산 확보 부문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통령이 100만원 기탁=과학재단의 기초과학연구기금은 설립 당시 대통령이 낸 100만원의 기탁금을 시작으로 해마다 증가해 지난 81년에는 62억6000만원에 이르렀다.
당시 연구 활동 지원 사업으로 92개 과제를 선정해 3억3509만6000원을 지원했다. 이 액수가 과학재단이 시행한 첫 번째 연구사업이다. 고급 연구 인력 양성을 위해선 국내 석·박사 과정 70명에게 모두 2400만원이 지원됐다.
이 같은 지원은 80년대 들어 국내 대학원 박사 학위 취득자가 급격히 늘면서 박사후 해외 연수 사업과 국비 위탁 사업으로 발전하게 됐다.
80년대 과학재단은 중화학공업 중심에서 첨단기술 중심의 기술 우위 정책으로 전환 고밀도집적회로와 마이크로컴퓨터·전자교환기·광섬유통신·천연색필름의 국산화 개발 등에 예산을 지원하고 나서며 든든한 산업화 지원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과학재단이 현재의 첨단 틀을 갖춘 시기는 90년대 들어서다. 이 때부터 우수연구센터(SRC) 지원 사업이 착수됐고, 지역협력연구센터의 육성에 나서며 공학연구센터(ERC) 지정을 시작했다. 조직 규모도 90년 처음 100명을 넘어 지난 96년엔 117명에 이르렀다.
◇세계 3대 기관 발판 마련=2000년대 들어서 과학재단은 선진 시스템을 구축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2004년 국가 과학기술 체계 개편에 따라 그동안 기초 연구 지원 영역에 머물던 과학재단은 종합적인 연구 지원 전문 기관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국가 목적 기초, 원천 R&D 사업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명실상부한 전담기관으로 자리를 굳힌 상태다.
특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기를 맞아 지난 2003년 디지털 연구 행정 시스템 가동으로 연구 관리 행정의 전 과정을 인터넷과 인트라넷 기반으로 구축,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 업무 처리 및 자료 검색이 가능하도록 수요자 중심의 고객 만족 경영 체계를 구축했다.
신동주 연구진흥단장은 “기관 혁신 브랜드인 ‘연구마루시스템’의 성공적인 도입을 위해 연구비 전자 정산을 확대 시행하고 전자 협약 및 원 클릭 과제 흐름 확인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다”며 “현재는 경영 방식이 고객 중심형으로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라고 말했다.
◆인터뷰-최석식 이사장
“한국과학재단의 30년 역사에서 ‘연구마루시스템’의 도입이 가장 획기적인 변화라고 봅니다.”
최석식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은 “이 시스템이 연구 개발 사업의 과제 선정에서부터 연구비 지급까지의 절차를 종전의 8단계에서 5단계로 축소시켜 보통 60일 정도 걸리던 업무 처리 기간을 15일 내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도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 협약 시대를 열며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 지원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은 “지금은 연구비의 전자 정산 시스템을 구축 중”이라며 “조만간 연구 관리의 전 과정을 디지털화해 시간과 경비·인력의 절감은 물론 연구 관리 행정 업무의 효율을 파격적으로 높여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04년 과학기술 행정체계 개편 때 과학기술부의 국책 연구개발 사업의 관리를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으로부터 이관받아 업무의 볼륨을 연간 1조4000억원대로 대폭 확장 세계적인 지원기관으로의 도약 발판은 마련한 셈입니다.”
최 이사장은 그동안의 혁신 성과에 대해 “다른 연구관리 지원기관에 비해 다소 뒤떨어져 있는 점이 곳곳에서 발견됐지만 최근 혁신 토론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면서 ‘복도통신’과 ‘유비통신’이 많이 줄며 혁신의 전파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며 조심스레 전망했다.
최 이사장은 현재 직접 주재하는 월 1회의 혁신토론회와 매월 두 번째 월요일 오전 정기 혁신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최 이사장은 이와 함께 과학재단을 세계적인 수준의 우량 서비스 기관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고객 중심의 인식과 평가 △고객 편의 중심 조직 개편 △고객 그룹별 연구성과중심제(PBS)의 전면 시행 등 3가지를 꼽았다.
“지난 30년 동안 국내 최고 연구관리 및 지원기관의 명성을 쌓는 데 성공했다면 앞으로의 30년은 미국의 국립과학재단(NSF)이나 독일의 연구협회(DFG)와 대등한 수준의 연구관리 기관으로 발전, 과학재단이 연구 개발 정책의 싱크 탱크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최 이사장은 앞으로 3년간 나아가 과학재단이 향후 30년간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책의 일단을 내비쳤다.
대전=박희범기자@전자신문, hbpark@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한국과학재단 현행 조직 및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