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내 오필라 지역에 위치한 프랑스 1위 이통사업자 오렌지 매장. 월 29유로(약 3만5000원)에 기본 1시간통화, SMS 무료 30건, 5개 번호 무제한 통화가 가능한 상품이 대학생들에게 꽤나 인기다. 그러나 매장을 찾은 사람의 80%는 구경만 할뿐이다. 최신형 단말기를 구매하기 위해 직접 지갑을 여는 사람은 드물다. 약정 기간이 끝나거나 좀 더 기다리면 훨씬 더 좋은 요금제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영국 등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경쟁활성화가 비교적 더뎠던 프랑스는 최근 △3위 사업자 브이그텔레콤의 공세 △MVNO 등장에 따른 파격 요금제 △제 4이통사업자 선정 등과 맞물려 가장 열띤 경쟁의 장으로 변모했다.
◇ 후불 정액제 시장 정착=보다폰 계열의 프랑스 2위 이동통신 사업자 SFR의 장 도미니끄 부사장은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몇년 새 통화요금이 연간 10%씩 내려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금 자체를 내린 것보다 2시간부터 5시간까지 정액제 요금이 다양하게 쏟아지면서 분당 요금이 내려갔다는 설명이다.
브이그텔레콤의 페레드릭 루시악 마케팅 담당 임원은 “96년 당시 36유로에 3시간 무료통화 상품을 최근 33유로에 2시간+2시간(6시 이후 이용)을 제공하는 등 해마다 혜택을 늘렸다”라고 말했다. SMS 요금도 정액제를 통해 기존 12∼15센트(150∼180원)수준의 단가를 7∼8센트(100원) 수준으로 낮췄다고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대거 출현한 20개의 MVNO들은 기존 MNO사업자들의 요금제를 더욱 공격적으로 변모시켰다.
◇ 요금 내려가고 가입자 늘고=프랑스의 1인당 연간 통신요금이 2005년 601달러에서 2년새 50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경쟁의 효과인 셈이다. 요금이 내려가 소비자들도 즐겁지만 사업자들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정액제 활성화 등으로 2004년 3500만명이던 프랑스 이통 가입자는 올해 4900만명으로 무려 40%나 늘었다. 휴대폰 가입률이 77%에 불과해 120% 안팎의 다른 유럽 국가보다 잠재성이 큰 덕분이다. 장 도미니끄 SFR 부사장은 “요금이 인하됐지만 2006∼2007년사이 전체 통화량은 오히려 17%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통신위원회인 ARCEP의 가브리엘 가우디 통신위원도 “분당 요금은 분명히 내려갔지만 통신 업체 매출엔 큰 변화가 없다”고 말해 이 같은 상황을 뒷받침했다.
◇ “요금제 15∼20개 넘으면 곤란”=사업자들은 경쟁을 위해 요금제를 무작정 늘리지는 않는다. 장 도미니끄 SFR 부사장은 “사용자 혼선을 줄이기 위해 요금제는 10∼12개를 넘기지 않는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이통사 팜플렛을 보고 요금제가 하도 많아 놀랐다”는 말도 전했다. 오렌지도 매장에서 파는 요금제가 7개를 넘지 않는다. 선불 2종, 정액제 3종, 청소년 블럭요금제 2종 등이다. 브이그텔레콤도 선불카드를 포함한 전체 요금제수를 20개로 제한했다. 브이그의 임원은 “요금제가 20개를 넘어서면 소비자에게 부담이 된다”며 “복잡성을 제거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뷰-가브리엘 가우디 ARCEP 통신위원
“지금도 시장경쟁이 충분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네번째 3G 사업자를 선정하면 시장이 더욱 활기를 띠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프랑스 통신위원회인 ARCEP의 가브리엘 가우디 통신위원은 무엇보다 시장경쟁을 활성화시키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주력한다고 강조했다. 사업자의 소매요금에 관여하지 않지만 충분한 시장경쟁을 유도해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게 기본원칙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사업자간 상호접속요율에 개입하는 도매규제를 통해 소매요금 인하를 유도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 요금규제는 어떤가.
▲ 유선에서는 한때 프랑스텔레콤의 소매요금을 규제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모바일 규제는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시장을 분석해 충분히 경쟁적인가를 판단하고 활성화 방안을 유도한다. 도매요금에는 개입한다. 최근 3년새 상호접속요율을 25유로에서 7.5유로로 내렸다. 이렇게하면 소매요금 인하에 간접 영향이 미친다.
- 도매규제를 통해 소비자 요금이 인하된 사례도 있나.
▲ 일례로 SMS 요금이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나왔을 때 사업자간 접속료를 5센트에서 2.5센트로 내렸다. 그랬더니 SMS 요금도 내려갔다.
- MVNO 참여 등으로 시장이 충분히 경쟁적인 것 같은데.
▲ 1년반전부터 MVNO를 허용해 최근 3∼4개월동안에만 15개의 MVNO가 생겼다. 시장활성화에 일부 도움이 됐지만 수익성 악화, 매각위기 등 현 MVNO들의 상태가 썩 좋은 게 아니다. 아직도 시장경쟁이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지켜보고 있다. 7월 중 제 4의 3G 사업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신규사업자를 어떻게 선정하나.
▲ 공개입찰이다. 현 사업자들은 사업권 획득을 위해 각각 6억1900만유로와 함께 연간 매출의 1%를 출연금으로 낸다. 제4사업자는 후발주자인만큼 초기 6년동안 자가망을 20%만 구축하고 나머지는 타사업자들에게 제공받을 수 있도록 혜택을 준다. 라이센스 비용에 대한 지불 시기를 늦춰달라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프랑스 소비자단체의 활동
프랑스는 비정부기구(NGO)가 발달한 나라답게 통신 관련 소비자운동이 유럽 국가 가운데 비교적 활발하다. INC, UFC 등의 통신 관련 NGO들이 있으며 통신 소비자권리를 찾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통신 컨설팅 업체인 지텍스의 소피 로렌 컨설턴트는 “프랑스 NGO들은 요금 자체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 사업자의 요금담합이나 모호한 요금고지서, 번호이동 지연 등 불합리한 서비스 관행을 바로잡는데 집중한다”라고 말했다.
2003년에는 분당 과금을 초당과금으로 바꾸라는 요구를 통해 일부 내용을 관철했다. 소비자가 읽기 어려운 요금고지서나 과대광고 등에도 제동을 걸었다. 최근에는 번호이동 지연 문제에 대응했다. 사업자들이 늑장을 부리면서 번호이동에 최대 두달이 걸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개선하는데 소비자단체의 역할이 컸다.
이 뿐만아니다. 몇년전만해도 프랑스에 3개 사업자밖에 없어 가격담합 우려가 컸는데 이 부분에도 NGO들의 항의가 거셌다. 가브리엘 가우디 ARCEP 위원은 “2∼3년전만해도 3사가 담합해 정액제 몇개만 만들어놓고 소비자에게 별로 신경을 안쓴 부분이 역력했다”고 말했다.
사업자와 소비자단체간 불협화음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SFR의 관계자는 “소비자단체와 소비자가 괴리됐다”며 꼬집었으며 브이그텔레콤의 임원도 “소비자 단체는 언제나 우리를 도둑이나 아이 취급한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이 일상화한 이 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반영하듯 극한 대립보다는 대화 채널을 만들어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SFR은 1년에 한번씩 소비자단체와 정기적인 협의 테이블을 갖는다. 이동통신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나 통신 문화의 발전은 더딘만큼 같이 머리를 맞대 고민한다. 브이그텔레콤도 협의 틀을 만들어 대화를 시도하며 소비자 문제가 있을때는 중재자를 구성해 중립적인 해결에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취재후기
프랑스 이동통신 시장 발전은 느렸다. 우리나라는 고사하고 영국, 이탈리아와 비교해도 그렇다. 보급율은 70%대로 유럽 국가로선 상당히 낮은 편이다. 휴대이동방송도 이제서야 소개되는 모양이다. 조만간 휴대폰 소액결제를 추진하겠다고 하니 이미 일상화한 우리의 눈으론 지나도 한참 지난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번호이동에 한두달이 걸리다가 최근 열흘로 ‘대폭’ 줄었다는 말에는 아예 할말을 잃었다.
네트워크 커버리지도 마찬가지. 사업자 자율로 하다보니 외곽이나 농촌지역에는 망 구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자체가 망을 깔고 사업자가 이를 임대해 서비스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 현지인들로부터 한국의 망구축과 정부·사업자간 일사분란한 협업이 부럽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일단 원칙을 세우면 확실하게 다지고 간다는 느낌이다. MVNO를 완전 개방하면서 경쟁활성화를 유도하는 선진적인 통신규제는 벤치마킹 대상이다. 프랑스의 IPTV 결합서비스는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앞섰다. 소비자 단체와 사업자간의 열린 대화채널도 마찬가지다. 통신강국인 우리나라도 분명 배울 게 있었다.
파리(프랑스)=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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