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디자인으로의 대통합 시대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휴대폰 디자이너들이 신제품 디자인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휴대폰 디자이너들이 신제품 디자인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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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규 ㈜콜로소 연구소장·서울시립대 겸임 교수 ykchi@colosso.net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사방에서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차베스 정권의 베네수엘라 혁명처럼 먼 나라의 이야기나 ‘쩐의 전쟁’ 처럼 TV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리없이 일어나는 일상의 혁명과 전쟁들이 우리의 도처에 널려있다. 반도체 혁명, 유전자 혁명, 로봇 혁명을 비롯한 디지털 혁명들, 그리고 대선과 FTA 전쟁을 비롯한 정치·경제적 사안은 물론, 애플사의 아이폰처럼 기업의 휴대폰 출시까지 ‘전쟁’과 ‘혁명’의 꼬리표를 달게 됐다. 우리가 현재 직면해 있는 이러한 변화들이 과거, 혁명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비교했을 때 무게감이 다소 가벼울지 몰라도 분명 혁명적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이 중 ‘디자인 혁명’은 그 정점에 있다. 과거 대기업에서 입으로만 그 중요성을 되새김질 하던 디자인이 이제는 그 상업적 성격에서 벗어나 21세기 새로운 키워드로 대두되고 있다. 이제는 기업이 아닌 국가, 지자체, 공공기관까지 ‘디자인 경영’ ‘디자인 도시’ ‘디자인 전략’을 외치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이다. 반면 부작용 또한 우려된다.

 모든 ‘혁명’이 그렇듯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혁명은 거의 없다. 그 배경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변화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들이 쌓여 어느 순간 폭발하면 ‘혁명’이란 이름을 얻는 것이다. 디자인 역시 기술의 발달과 함께 디자이너나 그 밖의 요인들의 노력이 멋지게 폭발해 나타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디자이너들은 지금껏 고립된 상태에서 고군분투했고 영업이나 개발과의 관계를 ‘적과의 동침’으로 인식해 왔다.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식 속에서 기업내 별동대로 여겨지던 디자인 조직은 오랜 시간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다행히도 디지털·모바일이라는 변화는 디자인 조직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혁명을 예견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구 및 회로를 설계하는 개발팀으로부터 설계서를 받아 외관을 씌우는 데서 벗어나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디자이너가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그로 인한 기술과 디자인의 시너지 효과는 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변화들은 전례 없던 스피드와 규모로 퍼져나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혁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한 팀으로 소속되어 ‘연인과의 동침’으로 지속될 수 있는 새로운 개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디자인 환원주의=새로운 혁명을 지속하기 위해서 디자이너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인 환원주의다. 80, 90년대초, 우리나라의 가전업계는 놀라운 발전을 일궈냈다. 디자인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개발과 영업 조직과 함께 ‘세계 최초’ ‘세계 최고’를 이뤄내기 위해 과감하거나 혹은 과장된 디자인을 추구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기능이 들어가 있는지를 과시하기 위해 외형을 복잡하게 디자인하기도 했고, 버튼이 4개 밖에 없는 제품에 디자인 기술을 넣어 버튼 수를 늘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50, 60년대 미국 포드 자동차가 과장된 치장으로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때가 있었다. 기술이 컨버전스가 이뤄지기 전에는 TV는 ‘보는’ 상자였고, 오디오는 ‘듣는’ 상자였다. 전화는 ‘통화’라는 단순 기능 외에 다른 기능은 기대할 수 없었다. 부의 척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취급되면서 복잡한 디자인은 기능성이 좋은 제품으로 오해돼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디지털 바람은 각종 기능을 통합해 고유성을 흔들었다. TV와 오디오가 AV로, 카메라와 휴대폰이 폰카가 됐다. TV, 오디오, 카메라, 컴퓨터가 결합하고 전기제품에서는 에어컨과 난방기와 공기청정기 등이 통합됐으며 냉장고에 정수기와 컴퓨터가 들어가는 등 그 한계를 가늠할 수가 없다.

 오늘날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현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디자인의 미니멀리즘을 내세우고 있다. 시각 예술 분야나 음악에서는 이미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등장했고, 건축에서는 20세기 말 절제된 표현과 물성의 극대화라는 미니멀리즘 건축이 유행했다.

 그러나 제품 디자인의 미니멀리즘과 타 영역의 미니멀리즘에는 차이가 있다. 예술 분야가 시대의 변화에 의한 선택적 사고의 결과였다면 제품디자인은 선택이 아닌 기술의 융합에 의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디자인의 미니멀리즘은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환원주의는 ‘복잡한 개념을 단일 레벨의 기본적인 요소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러한 환원주의야 말로 더욱 복잡해져 가는 기기를 표현함에 있어 학습 없이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 중심의 본능적 디자인을 구현하는 지표가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통합적 사고=또 한가지 넘어야 할 과제는 디자이너들이나 관련 부서의 데카르트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이다. 그에 대한 몇 가지 항목을 열거해보자. 첫 번째, 디자이너 자신이나 그 조직은 디자이너의 역량을 스페셜리스트(컨셉트디자이너)냐, 제너럴리스트(양산디자이너)냐로 양분화했다. 두 번째, 각 개발 관련 부서는 디자인은 그림을 그리고 영업은 마케팅 전략을 계획하고 개발은 부품이나 설계를 통한 제품 사양을 정하고 완성하는 명확한 경계를 그어왔다. 즉 내가 할 일과 네가 할 일에 대한 영역을 흑백 논리와 같이 구분지었고 이 영역을 뛰어넘으려는 노력들이 많은 마찰을 서로에게 불러 일으켜왔다. 세 번째로는 제품 디자인에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냐에 대한 문제이다. 외관에서 느껴지는 형태의 우수함이냐, 제품기획에서의 정확한 트렌드 분석이냐, 아니면 사용 편리성을 고려한 UI(User Interface)냐에 대한 서로의 상반된 입장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산업시대적인 발상이고 데카르트적 이분법으로 이 시대의 문제 해결 방법에 역행하는 잘못된 사고이다. 시장에서 디자인 결과물이 혁명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경우, 디자이너는 마케터이자 부품 개발자며, 스페셜리스트이자 제너럴리스트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각 관련 부서는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어야 하며 이를 진지하게 포용하고 수용하려는 마인드를 갖춰야한다. 디자인 조직 내에서는 더욱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제 디자이너를 키우고 활용하는 데에 있어 이 둘을 적절하게 결합시켜야 한다.

 애플 신화의 주역 스티브 잡스는 학창시절 그의 제품의 외관이 아닌 그것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설계공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러한 모든 요건을 구비하고 타 학문과의 다차원적인 통합을 시도한 디자이너가 있었다. 건축, 과학, 천문, 철학, 예술, 공학에 이르기까지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를 포괄하는 종합적 문제해결 능력의 뛰어난 디자이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오늘날의 혁명적 디자인을 의뢰하고 싶다.

 ◇휴대폰 디자인의 미래=과거 그 어떤 제품보다 시장에서의 휴대폰 경쟁은 숨가쁘도록 치열하다. 이처럼 빠른 제품 사이클과 넓은 시각으로 디자인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될 제품은 자동차 이외에 제품에서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며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어 놓는 역할의 정보 매체로는 휴대폰이 가장 선두에 있다고 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성숙기의 정점에 서 있는 국내 휴대폰 업계는 디자인 방향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그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자.

-명품에서 진품으로:거대 시장에서의 브랜드 선점, 즉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국내 업체들은 고가격, 고기능, 고품격의 휴대폰 전략을 유지해왔다. 그로인해 노키아나 모토로라와 같은 세계적 기업의 위치에 다가갈 수 있었고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명품은 사용자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는 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다 기능과 치장으로 디자인적 가치를 떨어뜨리기 쉽다. 즉 브랜드가 지향하는 거시적 이미지를 축소시킬 수 있는 폐해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와 달리 유럽이나 미주에서는 명품도 중요하나 진품으로 인식되는 제품 역시 중요하다. 진품이란 꼭 필요한 것만을 담은 합리적 가격의 화려하지 않은 친숙한, 즉 롱 라이프 디자인을 의미한다. 패션 상품 성격의 휴대폰 시장에서 대치되는 전략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라인 업에서 혁명적 진품은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향상시킬 것이다. 그것이 선진국 기업들과의 경쟁력에서 없어서는 안 될 다음 전략중의 하나이다.

-성숙기에서 해야 할 일:제품사이클을 분석하고 그 틈새 시장을 찾아내는 데에는 일본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 그들의 끈기와 디테일은 국민성에서 나온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은 노인을 위한 사용설명서가 필요없는 휴대폰, 청각이 좋지 않은 사람을 위한 휴대폰 등 전체가 아닌 특정 집단을 겨냥한 사회성 있는 제품 개발을 연구,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화려하지 않으나 이러한 일본의 휴대폰 전략이 세계시장에서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한 두려운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디자인 유전자를 찾아라:세계의 유명 디자이너들에게 한국의 휴대폰 디자인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선진국보다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들 말한다. 우리들 자체 평가와는 상반되는 의견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찾거나 인정하는 일에는 인색한 것 같다. 빠른 개발 일정과 기술력 부족만으로 변명이 될지는 모르겠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디자인에도 공력이 있을 수 있고 기술력이 문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디자인이 그 동안 등한시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디자인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우리의 디자인 유전자를 찾는 일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빠른 사이클로 돌아간다 해도 타 분야와 같이 변치 않는, 혹은 기준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디자인 유전자가 있어야 한국의 디자인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유전자가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면 된다. 아마 그러한 노력들이 이미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디자인으로의 대 통합:“모든 과학은 예술에 닿아 있다. 모든 예술에는 과학적인 측면이 있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아르망 트루소의 말이다. 월경(越境)과 통합(統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가지 지식만으로는 르네상스적인 혁명을 일으킬 수 없으며 창조적 사고는 지식의 대통합으로 문을 열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디자인이야말로 이러한 주장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적 감성이 결합되고 글로벌 시장 개척이 필요한 휴대폰과 같은 제품에서야말로 디자인의 의미를 극한까지 확장시켜야 한다. 또한 여러 학문과 다양한 분야가 집약돼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마지막 정점에는 디자인의 역할이 가장 크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다. 20세기의 예술가가 장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한 분야를 오랫동안 갈고 닦았다면 21세기의 장인은 예술과 기술, 과학 간의 연계사슬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디자인 과정은 서로 통합되고 인접 영역은 다시 디자인으로의 대통합되는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약력

1990년 홍익대학교 공업디자인과 졸업

2001년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졸업

2006년3월 동경예술대학 디자인 박사과정 졸업

1990∼1999년 대우전자 디자인연구소 근무

1999∼2003년 일본동경 디자인분소 분소장

2003∼2006년 일본 우주스테이션 개발 디자인 참여

2007년∼현재 ㈜콜로소 연구소장·서울시립대 겸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