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평(坪)`은 우리 전통 단위가 아니다

정부는 척관법의 단위를 법정단위인 미터법으로 대체하기 위해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방법으로라도 단위 통일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대상이 되고 있는 단위는 넓이의 단위인 ‘평’과 무게의 단위인 ‘돈’이다. 산업자원부에서 법정 계량단위의 도입과 관련해 배포한 설명자료에 보면 법정 계량단위를 바꿔야 하는 당위성 가운데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부분이 있어 흥미를 끈다. 즉, 평은 일제 때 경제침탈의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며 돈은 일본의 진주양식업자가 널리 사용하던 단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평과 돈이 워낙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돼 있다 보니 사람들은 이것이 정말 그런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과거 기록에는 넓이 단위인 ‘평(坪)’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파(把), 속(束=10파), 부(負=10속), 결(結=100부) (결부속파법)이라 하여 면적의 단위 체계가 사용돼 왔다. 논이나 밭의 면적을 나타낼 때에는 마지기라는 단위도 쓰였는데 이것은 지역마다 그 크기가 달랐다. 그 이유는 땅의 면적을 기준으로 마지기의 크기를 정했던 것이 아니라 소출량에 따라 그 크기를 정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지역마다 기후 및 토양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양의 곡식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땅의 넓이가 달랐던 것이다. 집의 크기를 말할 때에도 주로 ‘칸’을 사용해 아무리 세도 높은 양반이라도 99칸 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게 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디 우리 나름의 단위 체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시대에 따라 그 크기가 약간씩 달라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길이의 기본단위 척(尺)과 질량 기본단위 량(兩)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의 척양법(尺兩法)이나 일본의 척관법은 중국에서 비롯돼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져 각국에 맞게 변형된 것이다. 1돈은 중국 당나라 시대 동전의 질량 1전(錢)에서 유래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錢)을 메이지 시대에 몸매(Monme)로 바꿔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돈이나 돈쭝으로 바뀌어 사용됐다.

 평(坪)은 중국의 면적 단위 보(步)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쓰인 단위이다. 일본에 합병(1909년의 도량형법에서 평 단위를 사용함, 1910년에 한·일 합방이 되기 전부터 도량형법은 영향을 받음)된 적이 있는 한국이나 대만에서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미터협약이 체결된 후인 1902년에 고종 황제는 도량형규칙을 제정하고 평식원을 설립하여 미터법에 기반한 척양법(尺兩法)을 도입했다. 그러나 1909년 일본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에 확정된 척관법의 단위인 평·관 등의 단위가 그대로 도입됐다. 여기에서 면적의 단위는 사방 6척을 기준으로 하는 평, 묘(=30평), 단보(=10묘), 정보(=10단보)로 됐다. 무게의 단위는 1관을 3.75㎏으로 해 근, 냥, 전(돈), 분, 리 등으로 됐던 것이다.

 고대의 국가통치에서 도량형 제도의 정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도량형이 통일돼 있어야 경제활동의 질서가 잡히고 조세의 징수가 공평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국가를 통일하면 반드시 도량형 제도의 정비가 뒤따랐다. 중국 진시황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가 도량형제도를 통일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종대왕이 도량형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과학적으로 사회 과학·문화 사업 등을 추진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식민 통치를 시작하기 직전부터 우리 고유의 도량형 제도를 없애고 일본의 도량형 제도를 사용하게 한 것은 식민통치를 위한 치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번 정부의 법정단위 사용에 대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미터법이 정착된다면, 여러 단위의 혼용에서 오는 혼란과 복잡성으로 인한 국가적인 손실을 없애고 이로부터 오는 편리성과 효용을 온 국민이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작게는 아직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가 있다. 나아가 국내적으로는 경제활동의 질서와 신뢰가 확보될 것이며, 국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체제 하에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광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khchung@kriss.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