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들이 대거 해외우수 연구인력 유치에 나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기계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8개 국책연구기관은 9일부터 11일까지 미국 버지니아주 레스톤의 하얏트 레전시 호텔에서 열리는 한·미 학술대회(UKC) 기간 중에 해외채용설명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기계연과 생명연 등 일부 국책연구기관이 지난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개별적으로 해외 리쿠르팅에 나선 적은 있어도 이 같이 대단위 공동전선을 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화영 과학기술출연연기관장협의회(이하 과출협) 회장은 “UKC 행사를 하며 별도의 세션을 만들어 기관이 중장기적인 미래 지향 연구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스카우트하게 된다”며 “매년 재미 과학자와의 협력의 장으로 이어갈 기반은 마련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경우도 해외 유치 과학자의 사례에서 보듯 파격적인 대우나 조건을 내걸기가 어려워 ‘행사를 위한 행사’에 머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유치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사실 해외고급과학두뇌 유치와 관련해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2년 전 한국과학재단으로부터 ‘브레인 풀’사업(해외 두뇌 초청 사업)을 이관받아 지난해 80개 과제에 91명의 해외 과학기술자를 유치했다. 하지만 유치인력들이 인도 33명, 러시아 15명, 중국 7명 등으로 대부분 후진국 출신이고, 미국이나 캐나다, 일본, 독일 등 선진국 출신은 19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한인 과학자는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잡페어 세션 별도 구성=이번 행사 참여 기관은 과출협 간사기관인 한국기계연구원을 비롯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기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한국해양연구원 등 8개 기관이다. 또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표준과학연구원,한국과학재단 등은 과출협과는 별도로 UKC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번 사업 추진은 해외 우수 연구인력 확보가 개별 회원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출연연구기관의 중요 현안이라는 공감대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만큼 출연연이 중장기 과제를 기획하고, 가닥을 잡아 줄 고급 두뇌에 대한 갈증이 크다는 방증이라고 주위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이번 잡페어에 참석하는 KAIST는 최근 고급 두뇌 흡수의 ‘블랙홀’ 행태를 보여와 주목받고 있다. KAIST는 서남표 총장 부임 이후 올해 글로벌 대학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IT와 BT 분야는 물론 기계, 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 교수 10여 명을 대부분 UC버클리나 코넬대, 미시간 주립대 등 미 명문대 출신자들로 뽑았다. 이들의 전직 또한 카네기멜론대 조교수나 퀄컴 시니어엔지니어링 등이다. 향후에도 200∼300여 명을 더 충원할 계획이다.
◇한인 과학자 수백 명 국내 유치=통계가 잡혀 있는 지난 94년부터 2006년까지 브레인 풀 사업을 통해 유치된 해외 과학자는 총 1220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한인 과학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외국계인데다 최근엔 기관별 접촉으로 유치가 이루어져 한인 유치 과학자 숫자만을 산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전문가들은 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재외과학자 유치에 공을 들여와 지금까지 인력 대략 1600명 정도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재외 유치 과학자로 160번째 국내에 들어온 정광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은 “78년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공동관리 아파트도 마련해 주고, 몇 달 걸리는 전화 신청은 하루 만에, 출퇴근도 자가용을 배정받는 등 많은 특혜가 주어졌던 것이 사실”이라며 “최근엔 대우가 상대적으로 격하된 느낌”이라고 아쉬워했다.
◇유치 과학자들 지금 뭐하나=대부분 과학기술계 요직에서 우리 나라 과학기술 R&D 및 정책 수립에 큰 족적을 남긴 유치 과학자들이 많다.
현직에서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인사로는 정광화 표준연 원장을 비롯한 박창규 원자력연구원장, 항우연 민경주 우주센터장,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최완식, 정태형, 이영직, 이번, 서경수, 김명준, 김경옥 박사 등이 있다.
또 퇴직은 했지만 뒤에서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고 있는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원장과 황해웅 전 기계연 원장, 이세경 전 표준연 원장 등이 아직도 왕성한 재야 활동을 하며 건재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유치 과학자로 들어와 ETRI 원장을 지낸 정선종 전 원장은 “고급인력을 유치하기 위해선 최근의 중국처럼 경쟁력을 갖춘 유치 정책이 필요하다”며 “두뇌만 빌려 쓰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지원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3∼5년 단위의 프로젝트 베이스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유병곤 ETRI 기능성전자소자팀장-"영입 과학자 명확한 활용 계획 필요"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의 국내 유치는 국가 경쟁력 확보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다만, 해외 과학자를 제대로 활용할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명확해야할 것입니다.”
지난 91년 반도체 다국적 기업인 일본 히타치에서 1년간 근무하다 스카우트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기능성전자소자팀에 근무중인 유병곤 팀장은 해외 과학자의 유치 사업에 대해 동의하면서 “3년이든 5년이든 프로젝트를 마무리 한 뒤 결과가 나오면 뭘 어떻게 할 것이라는 장기 플랜도 같이 세워야 할 것”이라며 책임감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다소 미진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유 팀장은 “지난 91년 ETRI 기숙사 생활하던 해외유치 과학자 동기가 5∼6명 됐는데 지금은 혼자 남고, 모두 부산대와 인하대 등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며 “당시 정부가 지원했던 전세 자금으로 26∼30평 아파트를 임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해외파들의 가장 큰 고민은 연구성과중심제(PBS)가 도입되면서 생각만큼 연구집중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3∼5년 출연연구기관에 몸담고 있다가 대학 등으로 많이들 빠져 나갔습니다.”
유 팀장은 “PBS가 좋은 제도기는 하지만 미국처럼 어릴 때부터 경쟁구조 속에서 훈련받아 온 사람들과 일본이나 우리나라처럼 여타의 요소가 많이 작용하는 데서 오는 차이가 간과 되다 보니 그 와중에서 혼란을 많이 느꼈던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유 팀장은 또 “일본이 우리보다 반도체 분야에서 3∼4년 앞서 있는 상태에서 유치 과학자로 국내에 들어와 자부심도 컸다”며 “그러나 요즘은 재충전의 기회마저 많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고 덧붙였다.
“공무원들이 해외에 나가 공부 대신 다른 일로 소일한다고 구설수에 오르는 세상입니다만 이들이 아이디어 몇 개만 가져와 제공해도 해외체류 비용은 뽑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요.”
대전=박희범기자@전자신문, hbpark@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브레인풀 사업 연도별 예산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