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에 동영상까지 오고가는 디지털 시대에 원로 소설가 박범신(62세)은 아직도 200자 원고지에 글을 쓴다. 인간이 지닌 상상력의 핵심 기본은 활자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국내 최대 인터넷 포털 네이버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박범신씨가 처음 손을 댄 것에도 또다른 믿음이 있었다. 문학잡지나 신문, 네이버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공간이라는 것.
“네이버라는 플랫폼이 문학잡지나 신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저에겐 네이버도 하나의 지면일 뿐입니다.”
명지대학교 교수실에서 만난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라며 “다만 200자 원고지 수십매를 네이버 측에 전달하는 게 미안하다”며 말을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십건씩 달리는 댓글에 당황
그는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하는 소설 ‘촐라체’의 ‘작가와 대화하기’ 코너를 통해 젊은 독자와 온라인으로 만난다. 소설을 놓고 토론하는 게 즐겁다. 인쇄매체에선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젊은 독자와 소통하겠다는 그도 하루에 수십건씩 달리는 댓글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에 처음엔 놀랐다.
“인터넷 댓글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해 수십개의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고 경이로웠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식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인터넷에 만연한 농담 수준의 짧은 글에만 매달려 있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논쟁하고 토론했으면 좋겠습니다.”
악성 댓글, 이른바 악플도 어김없이 그의 공간에 침투했다. 특정 지역 출신이라든지, 좌파라든지 근거없는 인신공격성 글들이다.
“말로만 듣던 ‘악플’을 직접 경험하니 당황스럽더군요. 하지만 나이도 나이인 만큼 악플까지도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있습니다.”
#그의 쓴소리, ‘좋은 화가들을 망라하는 네이버 화랑은 있느냐’
“네이버를 비롯한 인터넷 포털이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만큼 창조적이고 건전한 문화 생산을 해왔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인터넷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소비지향적이고 단순한 즐거움을 좇는 인터넷 문화에서 역기능이라는 그늘도 생기고 있습니다. 네이버 같은 포털이 더욱 적극적으로 좋은 문화와 콘텐츠 생산에 기여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좋은 화가들을 망라하는 네이버 화랑’은 없지 않습니까.”
인터넷에 소설을 순수 문학 작가로는 처음으로 연재하는 그의 쓴소리다. 인터넷 포털의 역기능을 막기 위한 사회적 책임 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접점이 넓은 만큼 좋은 문화를 생산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한 것이다.
그래도 미래를 마냥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저급한 악플이나 소비주의적인 콘텐츠로 꽉 차 있어서는 발전은 없다”라면서도 “악플이 달린 후에 네티즌들이 적절히 화도 내고 스스로 논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터넷의 그늘이나 역기능도 없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고 덧붙였다. 정책을 뜯어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정 능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삶의 중심을 잡는 콘텐츠가 오래 간다
“휴대폰이 보편화한 지금 수백개의 전화번호를 저장했지만 쓸쓸한 날에 연락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삶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기술의 발전이 삶의 발전인지 의문이 듭니다. 예전에는 싫은 사람과 술을 먹어도 휴대폰이 없어 불러 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오래 술을 먹다 보면 소통에 이르게 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이면을 보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뉴미디어도 소비지향적이고 쾌락적인 콘텐츠보다는 삶의 중심을 잡는 콘텐츠가 있어야 오래 갈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가 주는 부가가치를 즐겁게 활용하되 얽매이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새 미디어를 거부할 뜻이 그에겐 없다.“새로운 매체에 벽을 쌓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하기로 한 것입니다. 제 소설이 뉴미디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흥행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천만의 말씀
“소설 촐라체가 재밌다고 써주세요. 혹자는 제가 흥행에는 신경 안쓰고 일단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새 방식으로 구닥다리 콘텐츠를 향유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촐라체가 흥행해 제2, 또는 제3의 ‘촐라체’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갇혀 있는 문학보다는 독자들을 찾아가는 채널을 모색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그는 누구보다 이 시도가 성공하기를 원했다. 삶의 이면을 보는 데 한계가 있는 새 미디어들도 여기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제자가 함께 술마시다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릴 때 ‘뽀샵해서 올려달라’고 주문하는 소설가 박범신. 그의 블로그 연재 소설을 한번 더 ‘클릭’하게 만드는 건 바로 40년 어린 독자와도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는, ‘열린 생각’이 아닐까.
김민수기자@전자신문, mim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