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셋톱박스 산업에 제2의 전성기가 열리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전 세계 디지털방송 전환이 잇따르면서 꾸준히 성장해온 국내 셋톱박스업계는 지난 2년간 잠시 주춤했던 부진에서 벗어나 올해는 마침내 ‘기네스’ 실적을 예고할 태세다.
IMS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디지털 셋톱박스 출하량은 지난해보다 19%나 급증한 1억2000만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오는 2010년까지는 디지털 케이블·IPTV·지상파 셋톱박스 시장이 고속 성장을 주도하면서 출하량이 연평균 15%씩 증가, 이맘때쯤 1억9000만대를 넘볼 것으로 관측된다.
세계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휴맥스와 더불어 최근 국내 셋톱박스 산업의 초호황을 견인하고 있는 주력부대는 이른바 ‘2위권’ 업체다. 매출액 상위 5개 회사의 올 상반기 매출액은 568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9%나 뛰었다. 휴맥스를 제외한 4개 2위권 업체의 실적 개선은 더욱 돋보인다. 셀런·가온미디어·토필드·현대디지탈텍 등 2위권 4개사의 매출액 합계는 3000억원에 육박, 전년 동기 대비 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들 4개사의 영업이익 증가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6배에 이르고 있다.
여기다 재도약에 나서고 있는 홈캐스트나 한단정보통신·아리온테크놀러지 등도 셋톱박스 산업의 부활에 힘을 싣고 있다. 특히 이들 업체는 매출의 대부분을 해외 방송 시장에서 벌어들이면서 올해는 셋톱박스 전체 수출액도 1조2000억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IT 완제품 분야에서 셋톱박스만큼 호황을 누리는 동시에 수출 효자 노릇을 하는 업종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처럼 국내 셋톱박스 산업이 근래 급격한 성장을 일궈내고 있는 데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디지털방송이 막 확산되고 있는 아시아·중남미·동유럽 등 신흥 시장을 선점한 덕분이다. 지난 수년간 선진국 방송사업자 시장에는 휴맥스를 제외하고는 국내 업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최근 2위권 업체를 중심으로 아시아·동유럽·남미 등 신흥 시장에서 디지털 셋톱박스를 앞세워 방송사업자 시장에 진출하면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아직은 중국 등 후발 주자가 따라오기 어려운 기술력을 보유한데다 선진국 대형 업체로선 아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틈새시장이기 때문이다. 통상 오픈마켓으로 불리는 일반 소매유통 시장과 달리 방송사업자 시장은 한번 뚫으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매출이 보장되는 시장. 특히 2위권 업체 가운데 가온미디어는 올 들어 방송사업자 매출 비중을 76%까지 끌어올려 주목받고 있다.
세계 시장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국내 업계가 주력 제품군을 HD·PVR 등 고가형 셋톱박스와 하이브리드형 셋톱박스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도 주효했다. 휴맥스를 비롯해 가온미디어·토필드 등 주요 업체는 올 들어 HD·PVR 제품군 수출 비중을 많게는 50% 이상으로 늘려가고 있다. 이들 고가 제품은 유럽 등 선진국 시장에서 기존 SD급 셋톱박스의 교체 수요를 유발하며 최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보유한 인터넷 기반 기술을 바탕으로 신규 미디어인 IPTV 시장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점도 시장 전망을 밝히는 대목이다. 셀런의 경우 국내 업체 가운데 가장 먼저 IPTV 셋톱박스를 개발 상용화한 뒤 일본 시장에 먼저 진출했다. 지금도 일본 IPTV사업자인 네오팔래스21사에 IPTV 셋톱박스를 장기 공급 중이며 지난해 국내 첫 상용화에 나선 하나로텔레콤의 하나TV에는 지금까지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해왔다.
휴맥스를 포함해 국내 주요 셋톱박스업체의 선전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시아·동유럽·중남미 등 신흥 시장의 경우 여전히 디지털방송 보급률이 저조한 상황에서 국내 업계의 선점 효과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도 1∼2년간은 국내 업계가 보유한 HD·PVR 등 고부가가치 제품군에서 중국 등 후발 업체의 추격은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다.
다만 문제는 그 이상이다. 세계 최대 셋톱박스 시장인 미국 케이블방송사업자 시장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세계 ‘주류’로 부상하기 위한 1순위 과제다. 이와 함께 HD·PVR 제품에 이어 한층 기능성을 보강한 고가 하이브리드형 제품으로 더욱 확장하는 것만이 국내 셋톱박스 산업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보장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의 한결같은 중론이다.
서한기자@전자신문, h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