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첫 상용화’ ‘우리 손으로 첫 국제표준화’
지난해 6월 기대와 박수 속에 등장한 와이브로(모바일 와이맥스)는 1년 2개월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안개 속이다. 최근 소비자 관심이 조금씩 높아졌지만 이전의 신규 통신서비스 도입 때와 비교하면 너무 조용하다. 최근 미국과 유럽, 남미는 물론 아시아까지 20여개국에 30여개 사업자가 경쟁적으로 상용화 준비를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무선 통신 네트워크가 신통찮은 다른 나라와 달리 언제 어느 곳에서도 브로드밴드에 접속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와이브로는 달리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먼저 상용화했음에도 어쩌면 다른나라에서 먼저 꽃을 피울지 모르는 상황은 너무 낯설기만 하다.신규 서비스를 경쟁국보다 앞서 도입해 활성화해 세계 통신서비스를 주도하는 ‘IT코리아’ 공식이 그만 깨졌다.
◇성장엔진이 식고 있다= 이전에도 조짐이 있었다. WCDMA가 그랬다. 상용화 준비에 가장 앞섰음에도 일본과 유럽 등지에 기선을 빼앗겼다. WCDMA/HSDPA를 먼저 상용화했지만 자존심엔 상처를 입었다. IPTV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과 인프라를 갖고도 상용화를 심지어 개발도상국보다 뒤늦게 한다. 위성DMB와 지상파DMB는 앞선 상용화가 무색하게 사업자 모두 수익성을 못찾아 수년째 헤맨다.
경쟁적인 통신 플랫폼을 한꺼번에 도입하면서 정작 사업자가 원하는 규제 완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정부와 비즈니스모델을 치밀하게 만들지 못한 사업자의 합작품이다. 신규 서비스가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초고속인터넷과 CDMA 도입 때와 같은 강력한 엔진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통신방송정책연구실의 염용섭 박사는 “과거 시장이 정체될 때마다 초고속인터넷이나 이동전화라는 새 성장동력이 등장했는데 지금은 확실한 동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력 사업도 어렵다=KT의 주력사업인 음성통화 매출은 해마다 3000억∼4000억원씩 줄어든다. 인터넷전화가 등장해 감소 폭은 더 늘어날 수 있다. SK텔레콤은 매출이 해마다 늘어나지만 음성통화 매출이 정체하고, 데이터 매출 증가세도 꺾인 데다 요금 인하 압력까지 받으면서 11조원 매출 목표 달성이 힘겹기만 하다.
양대 통신사업자가 이런 상황이니 후발 사업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통신이라는 엔진에 의존하는 IT산업도 덩달아 위기다. SK텔레콤 김신배 사장은 “휴대폰 산업은 해외 기업의 저가 공세 및 신흥시장에 대한 잠식 심화로, 통신서비스 산업은 시장 포화와 성장 정체로 심한 어려움을 겪는다”라면서 우리 IT산업은 최근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위협 요인들=정부는 통신시장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인터넷전화를 도입하고 가상이동망사업자(MVNO) 제도도 추진중이다. 소비자 편익을 증진시키고 시장 경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마땅히 도입해야 하지만 설비투자 유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기존 사업자의 입장에선 설비투자도 하지 않는 신규 사업자에게 시장을 내줄 판이다. MVNO의 경우 20조원 이통시장 가운데 최소 10%인 2조원을 가져갈 것으로 관측됐다. 가뜩이나 주주들이 설비 투자를 곱지 않게 보는 판에 매출마저 줄어들면 투자에 엄두를 내기 힘들다.
융합 추세가 가속화하면서 예상치 못한 경쟁자들도 등장했다.무선 인터넷전화가 가능해지면서 단말기나 콘텐츠 업체들도 머잖아 네트워크 없이 통신서비스를 하는 상황이 다가온다. 하나의 네트워크만으로도 먹고 사는 게 충분했던 전통적인 통신사업 구조가 붕괴될 위기다.
중계기 업체인 쏠리테크의 정준 사장은 “통신사업과 관련한 기술이 너무 발달하다보니 이제는 성실함만으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게 됐다”라며 “통신사업 환경이 그 어떤 때보다 터프(Tough)해졌다”고 말했다.
◇아직 찾지 못한 신성장 동력=통신사업자들은 신규사업 발굴과 글로벌 진출과 같은 대안을 모색중이다.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글로벌 사업의 경우 KT NTC사업이나 SK텔레콤의 베트남 S폰 등 일부 성과가 있다. 하지만 해외 매출 비중은 1%도 채 안된다. 글로벌 사업 비중이 높은 싱가포르텔레콤,보다폰,텔레포니카 등 외국 사업자들과 비교하면 거의 미미한 수준이다.
KT의 경우 IPTV, 와이브로와 같은 성장 동력 이전에 무선재판매나 부동산, 솔루션 사업으로 근근히 매출을 보전하고 있다. SK텔레콤도 비즈니스 고객을 발굴하는 사업 모델을 찾고 있으나 아직 뾰족한 탈출구가 안 보인다. 성장 동력을 몇년간 찾지 못하자 큰 몸집이 되레 짐이 되는 상황이다.
염용섭 박사는 “컨버젼스를 주제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해외 기업들처럼 우리도 블루오션을 찾기 위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정준 사장은 “어떤 사업자든 기술력, 독창성, 전략, 기술을 모두 확보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꽉 막힌 규제로 인해 사업자들이 과감하게 투자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신업계는 활력을 잃고 있다.
◆날로 고조되는 사업자간 갈등
KTF와 LG텔레콤은 최근 ‘번호 전쟁’중이다. 리비전A 서비스에 기존 번호를 허용할 것이냐 010으로 통합할 것이냐를 놓고 날선 공방을 벌인다. KT와 SK텔레콤은 정부의 재판매 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벌써 몇개월째 대립중이다. 최근엔 관련 토론회 당일날 양측의 담당자들이 불참할 정도로 신경전이 날카롭다. 유무선 사업자들은 경쟁사들을 통신위원회에 신고를 남발하면서 갈등은 더욱 증폭됐다.
통신사업자끼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케이블TV업계는 통신사업자와 IPTV 도입을 놓고 몇년째 대립했다. 방송업체들은 그들대로 지상파방송사 대 유료방송, 같은 유료방송사이지만 위성방송과 케이블방송이 각종 현안을 놓고 티격태격한다. 결론을 내려야할 정부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저마다 원인이 따로 있지만 공통적인 원인은 하나다. 적은 시장 파이를 놓고 경쟁하는 구조다.
‘인구밀도’를 낮추는 게 해결방법이다. 융합서비스를 비롯한 신 시장을 만드는 방법이다. 하지만 각종 규제에다 제 때 매듭짓지 못한 불합리한 시장 구조가 얽히고 설킨 시장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획기적인 변화가 나오지 않는 한 대립과 갈등 구조는 당분간 지속될 수 밖에 없다.
그 대가는 고스란히 업계로 전가됐다. 올들어 시민단체,방송사는 물론 청와대까지 바깥으로부터 이동통신 요금 인하 압력이 거세다. 하지만 업계는 공동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한 사업자 임원은 “요금은 업계에 가장 큰 현안임에도 올해 워낙 이슈가 많고 복잡한 데다 서로 갈등하면서 공동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가면 공멸한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자 최근 주요 통신사업자 CEO들이 전격 회동했다. 이 자리에선 가뜩이나 사업이 어려운 판에 반목까지 해선 IT산업의 엔진 구실은 물론 스스로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통신사업자 대외협력 담당 임원은 “올해 터진 각종 현안도 자세히 뜯어보면 이처럼 첨예하게 다툴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라면서 “안팎으로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과거 통신산업을 일궈가던 때와 같은 자부심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신화수기자@전자신문, hs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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