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자원이라고는 거의 없는 가난한 농업국가. 경작가능 면적대비 인구밀도 세계 최고. 인플레율 세계 최고. 수출은 GDP의 3%에 불과한데 그중 88%가 1차 가공품인 나라.’
언뜻 아프리카의 어느 한 나라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상황은 1950년대 한국의 상황이다. 2004년 10월 4일 워싱턴에서 열린 IMF 연차총회 때 IMF 수석부총재이자 미국의 대표적 여성경제학자 앤 크루거(Anne O. Krueger)가 연설한 내용이다. 아프리카의 발전을 기대하는 의미에서 한국의 발전을 사례로 꼽은 것이었다.
그 시절 산업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경제라 부를 만한 그 무엇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국 전자산업의 발전은 배고픔과 함께했다. 보릿고개 속에서 씨를 뿌렸고 잘 살기 위한 새마을운동의 노래 속에 발아했다. 70년대 일본과 합작 생산한 흑백TV는 이제 ‘그때를 아십니까’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김일의 프로레슬링을 보기 위해 TV 있는 집을 찾아 구름떼처럼 몰려다니던 시대가 지금 40∼50대의 유년기다. 지금은 넘쳐나는 전자제품으로 주체할 수 없는 시대지만 빈곤했던 그 시절이 중장년층에겐 뒤돌아보면 바로 엊그제다. 의식주 해결에 바빴던 시절에 전자제품은 사치에 가까웠다. 모든 부가 막연한 환상이었던 시절이다.
“1960년부터 2000년 사이 한국의 실질 1인당 GDP는 10배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중국·브라질·인도·말레이시아·멕시코 등을 능가하는 경이적인 성장 실적입니다. 1960년에 브라질과 멕시코의 1인당 GDP는 한국보다 높았습니다. 그런데 2000년까지 한국의 1인당 GDP는 거의 브라질의 3배, 멕시코의 3.5배 수준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는 30년 넘게 해마다 30% 이상의 수출성장률을 기록한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의 결과입니다.”
앤 크루거는 한국 경제 성장을 수출로 정의했다. 내수가 없는, 내수로는 도저히 규모의 경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수출이었다. 수출의 한가운데 전자산업이 있었다. 물론 섬유와 봉제가 초기 수출산업의 근간을 이뤘지만 선진대열의 본궤도에서 한국 경제를 이끈 주인공은 단연 전자산업이다.
수출 3000억달러를 넘던 지난 2005년 전체 수출의 3분의 1 이상이 전자 수출이었다. 해마다 전체수출에서 전자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지고 있다. ‘IT코리아’가 우리나라 대표명사로 쓰일 만큼 한국은 이제 전자에 관한 한 최첨단 선진국이다.
일본의 TV가 세계 최고라던 80년대를 넘어 2000년대는 한국의 TV가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최고가 명품 휴대폰은 한국 제품이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단연 최고다. 반도체까지 합치면 부러울게 없다.
일본의 ‘코끼리 밥통’을 사재기하던 시대는 이제 기억에서조차 희미하다. 한국의 압력밥솥 기술은 이제 일본과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김치의 세계화에 맞춰 김치냉장고 수출도 쏠쏠하다. IT를 넘어 음식한류·문화한류를 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5년간 한국의 전자산업은 숨가쁘게 달려왔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경제를 살려야 하는 맏아들 역할을 해왔고 기둥역할을 해왔다. 굳이 수치나 도식화된 도표로 나타내지 않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집안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고된 세월만큼 앞으로의 25년 역시, 잠시나마 엔진을 끄고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방심은 글로벌 무한경쟁에서 한순간 IT강국을 ‘IT약소국’으로 만드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저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신기술 개발에 나서는 이유는 언제나 칼끝을 겨눈 경쟁자에 대항한 생존의 몸부림이다.
먼저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주도하고 이끌어야 한다. 선점으로 인한 피지배를 겪어 본 기업과 사람만이 그 처절함을 안다. 앞서가는 자의 부의 향유와 권력의 힘이 어떤 것인지 이미 경험해 봤다.
전자산업에 관한 한 앞으로의 25년은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장담 못 한다. 생활과 직접 연관된 가전이 모든 정보기기와 통합되는 컨버전스를 맞는다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그러나 컨버전스 이후 IT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일부에서 개인에게 집중된 새로운 소비문화가 창출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하지만 예측일 뿐이다. 입는 컴퓨터의 일반화,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 할 만큼의 개인 헬스시스템, 로봇의 생활화, 칩 하나로 개인의 모든 정보와 건강까치 체크하는 마이크로 라이프 등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또 예측이 현실이 되는 시간 역시 그리 길지 않다.
분명한 것은 1970∼1980년대 전자산업이 물리적 노동집약산업이었다면 1990∼2000년대 전자산업은 고도의 지식집약산업이었고 앞으로의 전자산업은 생각과 감성으로 움직이는 ‘감성집약산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김성진 산업자원부 디지털융합팀장은 “지금의 전자산업 발전 속도라면 향후 25년의 생활상을 그려보기란 뜬구름 잡는 것과 같다”며 “지금의 생활과는 개념부터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확실시했다.
여기에 생산과 더불어 서비스 역시 중요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전자산업의 무게가 제조업보다 서비스에 치중되면서 2차산업에서 3차산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개개인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맞춤형으로 제공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소프트웨어 기술의 발달로 가능한 일이다.
1960∼1970년대 경제성장, 1980년대 전자산업의 기반마련 및 1990∼2000년대 획기적인 발전으로 볼 때, 상상의 미래 전자산업은 마냥 꿈만은 아니다.
이경우기자@전자신문, kw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