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5주년 특집(3)]IT가 바꾸는 삶-르포, 생산현장을 가다:LG전자 세탁기사업부 연구실

‘유럽에 ‘드럼’이 있다면 한국에는 ‘스팀’이 있다.’

전세계에 ‘스팀 세탁’이라는 생활 문화를 빠르게 확산시켜가고 있는 LG전자의 ‘스팀 트롬’. 드럼세탁기의 원천이 유럽이라면 그 드럼에 스팀을 입혀 세척력을 높이고 건강까지 생각하는 세계적인 특허 기술을 한국이 내놓았다. 지난 38년간 국내에 출시된 세탁기들이 우리나라 여성들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시켰다면, 스팀 트롬은 전세계 여성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전파하는 표준 제품으로 떠올랐다.

LG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DA)사업본부 세탁기사업부가 자리잡은 창원시 성산동 2공장. 1, 2층은 세탁기 생산라인이 쉴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2층 한 켠 연구실에는 스팀 트롬 개발 주역들이 머리를 맞대고 차기 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찜’문화가 많습니다. 음식을 조리할 때도 그렇고 식기를 소독할 때도 증기를 이용하죠. 찜은 간접 가열 방식으로 원 재료를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스팀 트롬’도 이 찜의 원리를 적용했습니다. ”

안인근(45) 책임연구원은 ‘스팀 트롬’이 세상에 선보이게 된 뒷 얘기들을 풀어 놓았다. 당초 연구원들의 개발 목표는 ‘물 없는(無水) 세탁기’. 드럼세탁기의 단점으로 꼽히고 있는 물·세제·전기 등 자원의 소모량을 줄이는 대신, 세척력을 높이고 세탁시간을 줄일 수 있는 혁신적 아이디어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나온 다소 엉뚱한 발상이었다. 좀처럼 구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 회의를 반복하던 가운데 도출된 것이 바로 스팀 가열 방식.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던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안 연구원은 “뜨거운 스팀이 통 내부에 분사되면 굳이 많은 물을 데우지 않아도 빨래의 온도를 상승시켜 세척력을 높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여기에 온수도 밑부분부터 채우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려 빨래를 고루 적시고 방망이질 효과도 거둘 수 있는 수로(水路)까지 개발해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발견은 드럼세탁기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했다.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빠르게 확산돼 나갔고 LG전자의 드럼세탁기 브랜드 ‘트롬’을 프리미엄 반열에 올려 놓았다. 덕분에 1990년 드럼세탁기를 첫 출시한 이후 2002년까지 100만대에 불과했던 LG전자의 드럼세탁기 출하량은 5년여만에 1000만대로 급상승했고, 세계적인 경쟁자 월풀의 안방인 미국 드럼세탁기 시장에서도 지난 2분기 1위를 차지하는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세일즈엔지니어링(SE)을 맡고 있는 조인호(46) 책임연구원은 “혁신적 기술에 ‘알러지 케어’라는 소비자 관점의 기능적 장점을 소구한 것도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포인트를 조사해 제품 개발에 적용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그는 수많은 스팀의 장점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알러지 케어’라는 단어를 찾아내 성공 신화에 방점을 찍었다. 같은 팀 박용(36) 책임연구원은 “결국 히트 상품이 되려면 고객의 요구를 면밀히 파악하고 그 눈높이에 맞춰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할 줄 알아야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덧붙였다.

스팀 트롬의 신화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LG전자의 특허를 요리조리 피해 스팀 방식을 채택한 드럼세탁기들을 경쟁사들이 줄줄이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안 연구원은 “기술이 범용화되면서 날이 갈수록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서 “89년 파업사태 이후 드럼세탁기 개발에 성공할 때나 IMF 이후 트롬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의 절박함을 잊지 않고 전세계를 깜짝 놀래킬 혁신적 기술을 개발해 보이겠다”고 말했다.

생산라인을 책임지고 있는 김현식(45) 생산실장은 “10초에 한 대꼴로 스팀 트롬을 생산해낼 수 있는 직원들은 오직 창원에만 있다”면서 “불량률을 최소화하고 생산성을 혁신해 더 좋은 제품들로 전세계 고객들의 사랑을 받겠다”고 다짐했다.

◆조성진 LG전자 세탁기사업부장 인터뷰

 “미래의 세탁기요? 의류와 관련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만능기기가 될 겁니다. 세탁과 헹굼, 탈수는 물론, 건조와 다림질, 보관도 세탁기 기능의 일부가 되죠. 세탁 공간을 통째로 파는 비즈니스도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탁기의 명장(名匠) LG전자 조성진(51) 부사장. 30년이 넘도록 오직 세탁기 개발의 한 길을 걷던 그가 이제는 전세계에 새로운 세탁 문화를 전파하는 전도사가 됐다. 누적 출하량 1000만대, 미국 시장 1위, 세계 최대 용량 개발 등 신기록 행진을 거듭하면서 지구촌 세탁문화를 드럼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

“드럼이 세탁판(Pulsator)이나 봉(Agitator) 방식 보다는 세탁력이나 비용적 측면에서 주류로 떠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만 먼저 시장을 일군 유럽 업체들을 따라잡으려면 확실한 차별화 포인트가 있어야 했죠.”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대용량과 스팀. 밀레·보쉬·아에게 등 선두업체들은 유럽 가옥특성상 24인치 6㎏ 이하 용량 제품을 판매했지만, 조 부사장은 2002년 ‘트롬’을 내놓으면서 7㎏, 27인치 등으로 대용량 경쟁에 불을 놓았다. 당시 봉세탁 방식을 쓰던 미국시장을 드럼으로 바꿔 게임의 룰을 다시 쓴 셈이다. 여기에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스팀’세탁 방식은 확실한 차별화 포인트로 LG 드럼세탁기를 프리미엄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덕분에 지난 2분기 미국시장에 진출한 지 5년여만에 월풀을 제치고 1위의 영예를 안았다.

1위 수성 여부에 대해 조 부사장은 “녹록치 않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답했다. 월풀이 이달말부터 스팀 방식의 대응 모델을 현지에 출시하는데다, 유럽 업체들이 대용량 제품을 내놓고 미국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대신 더 큰 용량의 제품과 스팀 기능을 확대해 맞불을 놓을 작정이다. 또 멕시코·브라질·대만·베트남 등 최근 드럼이 보급되기 시작한 신흥시장 공략도 본격화하고 건설사 대상의 빌트인 시장도 개척할 계획이다.

“혁신적인 제품으로 월풀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세계 1위로 등장하는 것이 목표”라는 조 부사장. 우리나라 세탁기 명장이 세계인들에게 또 어떤 문명의 이기를 선사할 지 자뭇 궁금해진다.

◆LG전자 스팀 트롬 향후 전략 

◇세탁기의 세대 구분

제 1세대 수동식(1860∼) 미국 트로이, 손으로 기계를 돌리는 방식

제 2세대 전기식(1910∼) 미국 토르(Thor), 전기 모터가 발명됨에 따라 전기로 구동하는 방식

제 3세대 반자동(1920∼) 세탁조와 탈수조가 분리된 형태

제 4세대 전자동(1950∼) 세탁조와 탈수조 일체형

‘스팀 트롬을 제 5세대 세탁기 표준으로 만들겠다.’

LG전자가 38년간 세탁기 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새로운 세탁 방식을 제안했다. 이른바 스팀 드럼 세탁 방식. 세탁수와 스팀을 동시에 분사하는 ‘듀얼 분사 세탁시스템’이라는 특허 기술을 바탕으로 드럼 세탁기의 새 장르를 열어 가고 있다.

8월말 기준으로 국내에서 판매되는 드럼 세탁기중 스팀 기능 적용 제품은 40%를 넘어섰고, 해외 판매 제품도 약 25%가 스팀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내년 목표는 전세계 판매량의 30%를 스팀 트롬으로, 2010년에는 50%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를위해 LG전자는 우선 지난 2분기 1위를 차지한 미국을 중심으로 용량 확대를 시도할 예정이다. 보쉬지멘스가 8㎏, 후버가 9㎏을 각각 출시했고 월풀이 스팀 기능을 적용한 제품을 이달말 내놓을 예정이다. 이에 맞서 LG는 27인치 크기에 4.2큐빅비트(16㎏) 용량의 드럼을 장착한 초대형 제품을 출시, 선두 업체 이미지를 유지하기로 했다. 신흥시장으로 떠오른 중남미와 아시아 지역에 드럼 판매를 확대하는 것과 건설사를 대상으로 세탁기와 건조기, 각종 수납장까지 패키지로 공급하는 빌트인 영업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이외에 미국향 스팀 트롬은 건조·다림질 기능을, 유럽향은 알러지 케어 기능 등 차별화된 소구점을 발굴해 ‘스팀 트롬=프리미엄’인지도를 제고한다는 전략이다.

정지연기자@전자신문, jy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