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1982년)
◇편리함을 맛보다=1980년대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견인했던 쌍두마차는 바로 전자제조업과 건설산업이었다. 건설업은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가옥구조를 대규모 집단 아파트로 바꾸는 데 앞장섰고 전자산업은 생활의 편리함과 윤택함을 더하는 생활가전사업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당시에는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가사노동을 덜어 줄 수 있는 가전제품의 보급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70년대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랐던 흑백TV가 컬러TV로 교체되기 시작했고 다이얼식 전화기도 상당수 보급돼 기본적인 통신 수단은 갖추고 있었다.
냉동고 일체형이긴 했지만 소형 기계식 냉장고는 여름철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고 시원한 얼음도 만들어 줬다. 수압이 낮아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형편이 나은 가정은 2조식 세탁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비록 종류는 몇 되지 않고 기계식·아날로그 방식이었지만 국민이 가전의 편리함을 맛본 시기였다.
◇산업화, 세계화 시작=1982년 10월, 당시 금성사(현 LG전자)는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해외 생산기지를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설립했다. 컬러TV 공장을 250만달러를 들여 착공한 것.
당시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이 6·25 전쟁을 딛고 일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지만 30여년 만에 가전의 본고장인 미국에 도전장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후 이 공장은 전자레인지·VCR 등 생산품목을 늘리면서 북미용 전진기지가 됐고 삼성전자 역시 그해 포르투갈에 현지 가전 생산법인을 설립해 뒤따라 나섰다.
기술 혁신의 노력도 이뤄졌다. 최초의 비디오카메라·CD플레이어·전자오븐레인지 등 기계식과 아날로그 가전에서 전자식과 디지털이 결합된 제품도 속속 개발돼 기술력이 본격적으로 증진됐다.
저변도 확대됐다. LG·삼성 외에도 린나이코리아·동양매직 등 외국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온 합작사가 잇따라 생겨났고 웅진코웨이·유닉스전자 등 전문기업도 가전산업을 일구는 풀뿌리가 됐다.
#.현재(2007년)
◇게임의 룰을 바꿨다=‘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정부가 지난 90년대 일관되게 외쳤던 캐치프레이즈다. 이 시기 우리 업체는 가전제품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고 나아가 정보통신기술(ICT)까지 연계해 ‘디지털 가전’ ‘IT 가전’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게임의 룰을 바꿔 디지털 컨버전스라는 새 영역에서 새로운 경쟁 구도를 만들자는 취지다.
지금은 애플 아이팟이 대명사가 됐지만 MP3플레이어를 최초로 개발한 것도 우리 기업이고 디지털TV 표준 방식을 주도한 것도 우리 기업이다. 이에 힘입어 LCD TV라는 신개념의 평판TV로 전 세계 TV 시장의 체질을 바꿨다.
인터넷 프로토콜(IP)을 접목한 인터넷 가전 영역도 우리가 발굴했다. 디지털 셋톱박스로 전 세계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주도하고 있고 PC와 가전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디지털 홈’ 시장도 우리 기업이 단연 앞서가고 있다.
◇‘메이드 바이 코리아’ 시대=현재 한국 가전 브랜드는 전 세계에서 신기록 경신을 거듭하고 있다. ‘보르도’ LCD TV는 가전 왕국 일본의 소니·마쓰시타를 물리치고 삼성전자를 전 세계 TV시장에서 1위로 만들어줬고 LG전자의 ‘트롬’ 드럼세탁기는 월풀의 안방인 미국에서 왕좌를 차지했다.
혁신적인 디자인과 디지털 기술의 접목 그리고 전방위적인 글로벌 브랜드 마케팅이 가져다 준 성과물이다. 올림픽 후원, 첼시·플럼 등 축구단 후원 등 전방위적인 스포츠 마케팅도 우리 브랜드를 프리미엄급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를 바탕으로 베스트바이·시어스 등 전 세계적인 유통망을 장악해 시장점유율 1위라는 기록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반면에 국내 가전 제조업의 기반은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물류비 부담이 큰 일부 내수용 가전을 제외하고는 중국과 동남아·멕시코 등으로 생산기반을 옮겼기 때문. ‘메이드 인 코리아’ 시대는 가고 ‘메이드 바이 코리아’ 시대로 변하고 있다.
#.미래(2032년)
◇‘아바타 로봇’이 업무를 척척=서울 강남 대치동의 김모씨 거실. 로봇 ‘휴보’가 외출 준비에 나섰다. 주인인 김씨를 대신해 해외 출장을 다녀올 참이다. 글로벌 가전 기업의 마케터인 김씨는 대부분의 업무를 집 안에서 해결한다. 별도로 마련된 집무실의 사방벽은 세계지도로 꾸며진 영상장치다. 통화를 원하는 곳을 클릭하면 해당 지역에 있는 바이어나 직원과 영상회의를 할 수 있다. 전 세계 누구나가 글로벌 로밍이 가능한 영상통화폰을 갖고 있어 굳이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다. 다만 이번 휴보의 출장은 북극 지역에 새롭게 출시할 디지털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의 현장 테스트를 직접 진행하기 위해서다. 휴보는 서울에 있는 김씨의 원격조정을 받아 북극 곳곳을 누비며 안정성 검사를 하고 돌아올 예정이다.
뉴욕 맨해튼의 글로벌 금융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는 이씨는 오늘도 와이브로 디지털카메라로 전 세계 고객에게 UCC 동영상 메일을 보낸다. 이씨는 그날그날의 주가 흐름이나 금융 이슈 등을 동영상 브리핑 파일로 만들어 즉시 보고한다. 시차가 있는 지역의 고객에게는 영상통화폰보다 동영상 메일이 커뮤니케이션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브랜드 바이 00’의 시대로=앞으로 가전산업은 더 이상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 중국에서 생산한 케이스를 들여와 멕시코에서 생산한 LCD 패널에 끼워 완성한 디지털TV를 북미와 중남미 시장에 내다파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일이다.
제조사의 개념도 없다. 유럽에 파는 삼성전자의 양문형냉장고 ‘지펠’은 폴란드 업체가 개발, 생산해 공급한다. 아시아에 판매되는 LG전자의 드럼세탁기는 태국 업체가 만든 것이지만 ‘트롬’의 브랜드를 달고 있다. 건강·환경 가전 전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웅진코웨이의 정수기와 비데는 각국 현지 업체가 제조해 웅진의 브랜드를 달고 나간다. 웅진코웨이는 다만 전 세계에 비즈니스모델(BM) 특허로 등록한 가전 렌털 노하우와 브랜드를 빌려주고 로열티를 받을 뿐이다.
김창현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글로벌 아웃소싱과 글로벌 생산체계가 본격화되면 제조국가나 제조사 등의 개념이 없어지게 된다”면서 “결국은 브랜드와 품질을 관리할 수 있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지연기자@전자신문, jy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