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구간에 망을 깔든 안 깔든 그것은 사업자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일입니다. 비즈니스 이슈에 정부가 개입할 이유가 없죠.”(마이클 리처드슨 영국 오프콤 규제담당 국장)
“통신사업자가 차별화한 요금정책으로 수익을 많이 거두면 보편적 서비스 요금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고, 네트워크 설비투자 여력이 생겨 전체 시장이 활성화된다.”(토머스 바네트 미 법무부 반독점국 총괄 차관보)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한 미국과 영국의 정부 담당자다운 발언이다. 규제가 없을 수 없는 통신시장에도 시장경제를 통한 경쟁활성화라는 원칙이 분명하게 녹아있다. 이 같은 정부의 굳건한 원칙은 사업자들에게도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오로지 시장에서 승부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통신판은 사뭇 다르다. 주요 현안에서 시장에서 승부하기보다 정통부에 가서 울고, 경쟁사를 헐뜯어 이익을 챙기려는 관행이 다반사다. 정부가 강한 규제를 통해 길들이고, 길들여진 사업자는 다시 규제의 틀을 적당히 이용해 실속을 얻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이질 않는다. 강한 규제가 세계 최고의 인프라 구축과 보편서비스에는 도움이 됐는지 몰라도 사업자의 자생력과 미래를 위한 재도약에는 막대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 너무나 많은 규제…피해가기 어렵다=정통부는 아직도 지배적사업자의 일부 서비스에 대해 요금인가제를 적용한다. SK텔레콤의 이동전화, KT의 시내전화 및 초고속인터넷 등이다. 요금인가제는 사업자가 마음대로 요금을 결정할 수 없고 정통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정통부는 인가제의 취지가 공정경쟁을 훼손하거나 가입자 차별부분이 있는지만을 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사후규제를 통해 시정이 가능하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요금인하 압력에 정통부가 별다른 논리를 내세우지 못한 것도 모두 요금인가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부는 아직 폐지계획이 없다. 시기상조라는 이유 외에 어떤 뚜렷한 근거가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인가제의 존속은 사업자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정통부의 의중을 고려해 요금제를 만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인터넷 시장경쟁이 활성화됐다고 얘기하면서도 KT 초고속사업은 올해도 인가 역무에 묶였다. 번호이동성 시차제는 비대칭 규제의 정점에 있는 우리나라만독특하게 도입했다. 물론 나라마다 특수한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덕지덕지 붙은 규제들이 사업자들로 하여금 경쟁보다는 규제기관의 눈치를 살피게 만든다.
◇ 이중규제·상이한 규제…어느 장단에 춤춰야하나=정통부 규제만이 아니다. 통신위의 사후규제, 공정위의 규제까지 포함해 다단계 규제에 얽매여 있다. 마케팅을 안하면 담합이라고 때리고, 마케팅을 하면 과열됐다고 조사에 나선다. 정통부가 후발사업자를 위해 선발사업자 요금을 규제하고 점유율을 행정지도 한 것을 공정위가 담합이라고 몰아부치기도 했다. 담합이나 불법 마케팅을 시장에서 감시를 해야하겠지만 이중잣대나 상이한 논리를 들이대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가령 LG텔레콤의 기분존 요금제는 정통부 약관신고에서는 별 문제 없었는데 통신위에서 가입차 차별로 문제가 돼 한바탕 곤욕을 치뤘다. 지난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시내전화 및 PC방 요금담합 행위로 KT 등 유선 3사에 총 12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물론 최근 법원 판결에서 과징금 규모가 과하다는 내용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중규제라는 지적을 피해가기 어렵다. 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동일한 행위에 대해 통신위와 공정위로부터 각각 규제를 받는 경우가 흔히 일어난다”며 “여러 장단에 같이 춤을 추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고 반문했다.
◇ 때늦은 규제완화…효과 미지수=정통부는 지난해말부터 규제로드맵을 통해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때 늦은 감은 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실효성이 의문시된다는 점이다. 결합상품 판매의 경우 올 7월부터 지배적사업자의 요금할인이 허용됐으나 한달이 지나도록 가입자 유치 실적은 몇만명 수준에 그친다. 유무선 모두 포화한 시장에서 결합상품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하겠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에 따라 2009년부터 재판매 의무화를 통한 MVNO 등 신규 통신사업자 출현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고 요금을 인하하겠다는 정통부 주장과는 달리 과연 어떤 신규사업자가 얼마나 참여하겠냐는 회의론도 고개를 들었다. 시기적으로 3∼4년 정도는 더 빨리 규제완화를 했어야했다는 지적이다.
또다른 문제는 사업자가 정작 필요한 규제 완화보다 다른 규제 완화에 집중되거나 완화 속도도 여러 변수로 인해 굴절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규제로드맵을 통해 만족시켜야하는 정책목표도 소비자편익과 경쟁활성화, 산업육성과 공정경쟁 등 모든 것에 걸쳐 있다. 사실상 힘겨운 실험이 될 가능성이 크며 그 와중에 사업자들만 힘들어진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
◆관건은 정책의 예측 가능성
최근 리비전A 서비스 식별번호를 둘러싼 논란이 상당한 파장을 낳고 있다. 010으로 결론이 났지만 LG텔레콤이 극구 반발하면서 후유증이 심상치 않다. 물론 기존 번호를 유지하든, 010 통합정책으로 유도를 하든 정책 결정의 문제라는 점에서 정통부 판단의 몫이다. LG텔레콤도 번호 정책 자체를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무너졌다는 것. 현행 번호 세칙이 엄연히 존재한 상황에서 서비스가 임박해서야 이를 번복하는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LG텔레콤은 지난해말 리비전A 설치승인을 하는 시점에서 번호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든지, 아니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번호세칙 변경에 대한 근거들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 3월 중순에 정통부가 통신 규제로드맵을 새롭게 발표하면서 가장 강조한 부분은 규제완화를 통한 경쟁활성화와 정책 예측가능성 제고였다. 그러나 예측 가능성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업자는 없다. 이동통신 요금만 해도 정통부는 인위적인 인하 없이 경쟁을 통해 추진하겠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청와대의 한마디에 방향을 거꾸로 틀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원론적으로 좋은 얘기지만 경쟁의 룰이 아무런 원칙 없이 뒤바뀌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정통부도 답답한 구석이 있겠지만 실제로 정책 예측가능성을 무너뜨린 사례는 올들어서만도 수차례다.
KT의 3G 무선 재판매의 경우 지난해 신고했을때는 정통부가 받아주지 않다가 올해 2월에는 받아들였다.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반려했으나 올해는 3G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지난 6월 다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에 지배적사업자의 재판매 제한조항을 집어넣어 강력한 규제를 표방했다. 신고를 수용할 당시 지배적사업자의 재판매 규제에 대한 어떤 메시지도 없었다. 시장 활성화와 규제사이의 시계(視界)는 거의 ‘제로’나 마찬가지다.
위피 정책도 마찬가지다. 논위피폰을 결국 허용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무선인터넷 기능이 있는 휴대폰에만 위피 탑재의무화가 적용돼 무선인터넷 기능만 없다면 위피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휴대폰에 위피탑재가 의무화인줄 알았던 사업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통부가 그때그때 상황논리에 따라 정책을 정하고 규칙을 재해석하면서 통신판에는 룰다운 룰이 형성되지 못했다”며 “그러다보니 사업자까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어거지식으로 새로운 룰을 들이미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진다”라고 비판했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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