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대부분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려 할 땐 TV를 켠다. e메일이나 웹서핑이 필요하면 PC를 켜고 가족과 통화할 때는 휴대폰을 꺼내 든다. 드라마를 안방까지 전달하는 방송 네트워크와 디지털 데이터를 전달하는 인터넷 네트워크, 음성을 전해주는 무선 네트워크가 다르기 때문이다. ‘거실이나 주방, 아니 내가 어디에 있든 각기 다른 장치를 쓰지 않고서도 내일의 날씨, 가족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할 순 없을까.’
◇‘내추럴 커뮤니케이션’=글로벌 통신장비 기업 알카텔-루슨트 산하인 벨연구소. IT 분야 최고의 연구개발(R&D) 기관으로 평가받는 이 곳은 ‘내추럴 커뮤니케이션(Natural communications)’ 구현에 몰두하고 있다.
내추럴 커뮤니케이션이란 사용자에게 친숙한 네트워크, 이와 관련된 기술, 실제 이뤄지는 행위 모두를 총칭한다. 지금까지의 네트워크는 사용자가 용도에 따라 선택하고 접근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벨연구소는 가까운 미래에 모든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하나로 통합(컨버전스)될 것으로 보고 있다. 종류에 관계 없이 모든 네트워크가 스스로, 더 나아가 지능적으로 연동해 자기 신체 일부가 늘어난 것처럼 유기적으로 사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용자는 입맛대로 선택만하면 된다.
벨연구소 측은 “새로운 네트워크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라며 “‘내추럴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는 건 큰 도전이며, 이러한 기술로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의 선봉에 서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전했다.
◇‘5대 핵심 과제’=벨연구소는 친화적인 네트워크를 개발하기 위해 중점 분야를 나눴다. 그 첫 번째가 어떤 네트워크든 무제한의 고품질 대역폭을 갖게 한다. 벨연구소는 현재 100기가비트이더넷(GbE) 수준은 기본 개발하고 있으며 향후 500기가비트이더넷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둘째는 지능화되고 개인화된 네트워크 부문이다. 사용자가 누구인 지, 어디에 있는 지 등과 함께 기호와 요구까지 인식해 서비스를 전달할 수 있는 네트워크다. 벨연구소의 정보화경영체제(IMS), 수학 및 소프트웨어 알고리듬에 기반해 개발되고 있다.
웹브라우저·TV·e메일 등 서로 다른 종류의 서비스를 하나의 기기 또는 하나의 네트워크에서 경험할 수 있는 차세대 블렌디드 서비스도 중점 과제다. 통신사업자는 이 블렌디드 서비스로 커뮤니케이션이나 엔터테인먼트, 또는 정보 등 콘텐츠 종류를 막론하고 고객에게 가장 맞춤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 밖에 메가비트와 테라비트의 빠른 속도로 네트워크를 이용하지만 초당 1비트에 불과한 현재의 키보드 입력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부문, 그리고 보안 부문이 있다.
◇‘사람을 향하다’=최근 벨연구소엔 화제가 된 일화가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한 연구원이 산행 중 우연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을 보고 연구 끝에 플렉서블 네트워크 알고리듬을 만든 것이다. 자기보다 몸집이 몇 배나 큰 거미줄을 만들면서도 장력을 고도로 조절하고, 균형 있게 만드는 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벨연구소 김종훈 사장은 “플렉서블 네트워크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라고 연구원을 치켜세우며 혁신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인도 등의 노동력이 저렴하다고 하지만 우리가 중요시 하는 것은 비용이 아닌 연구원의 창의성”이라고 힘줘 말했다.
벨연구소 측은 “연구원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추진하고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 준다”며 “연구원들이 어떤 일을 하도록 경영진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의 주인이 되도록 힘을 실어준다”고 덧붙였다.
벨연구소는 최근 이동통신 기술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기지국 라우터(Base Station Router)를 개발해 고무돼 있다. 이 기지국 라우터는 인터넷 기술을 근간으로 해 현재의 복잡한 무선 이동통신 구조를 간략하게 만들었다. 옥내서도 이동성을 보장하고 소형이어서 사무실이나 캠퍼스에서 사용이 적합하며 신속한 정보 전달로 체감 품질도 높다. 세계적 통신장비 업체인 알카텔-루슨트의 상용화로 또 한 번 벨연구소의 저력을 보여줄 지 기대된다.
▲벨연구소는
통신장비 업계의 공룡 알카텔-루슨트 산하 연구소다. 최고의 IT 분야 연구개발(R&D)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1925년 설립됐다. 중앙연구소 외에 수십 개의 연구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약 1만 여명의 연구개발 인력이 근무하고 있다. 전 세계 알카텔-루슨트 소속 연구 인력의 절반 정도가 벨연구소에 있다.
트랜지스터·라디오 천문학·광 트래핑·양자 유체학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기술을 개발했으며 1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원천 기술부터 실용 제품까지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으며 3만건이 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1925년 이후 4만개 이상의 발명품도 만들어 냈다.
연구개발 비용은 한해 알카텔-루슨트 전체 매출의 약 15% 정도다.
◆김종훈 사장 인터뷰
“혁신은 시장의 발전에 기초한다.”
세계 최고의 연구개발 기관으로 평가 받는 벨연구소 수장 김종훈 사장(47). 4년간의 대학 강연을 마치고 2005년 4월 벨연구소 사장으로 알카텔-루슨트에 복귀한 그는 취임 후 ‘기술 상용화(Technology Commercialization)’란 전담 부서에서 별도로 실용화 가능성이 높은 연구 계획들을 직접 관리하는 등 연구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김종훈 사장은 “혁신을 하기 위해서는 경쟁에 앞서 고객이 보내는 신호를 포착할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는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다.
-취임 후 실용연구를 강조해왔다. 어떻게 실현하고 있나.
▲먼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선택한다. 이어 시장 기회를 포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전문 지식도 최대한 활용한다. 그런 후 마지막은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것이다.(벨연구소는 ‘연구’를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기초 연구와 자산 관리에 중점을 둔 프로젝트, 단기간 내 시장에 적용될 수 있는 프로젝트다. 주목되는 것은 시장에 적용돼 잠재력이 큰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별도 조직을 만든 점이다. ‘알카텔-루슨트 벤처’라는 이름의 이 조직은 비즈니스 및 마케팅 전문가들로 구성돼 연구원들을 지원한다.)
-연구와 현실의 괴리 어떻게 조율하나.
▲시장과 밀접하려 한다. 또 창의적인 학계와 점진적이지만 지적인 자유가 없는 업계의 혁신 모델을 연결하는 연구 모델을 만들었다.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회사와 업계에 가져올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벨연구소에는 ‘고릴라 감시자 Gorilla Spotters’라고 부르는 전문가들이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트렌드와 소비자 요구를 파악해 연구의 방향을 잡아준다.)
-인재의 창의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의적인 인재를 뽑는 것뿐 아니라 유지,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한 데.
▲‘위닝(winning)’의 분위기를 강조한다. 또 전진을 위한 모멘텀을 만든다. 성공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큰 동기는 승리다. 이를 위해 작은 성과라도 이것을 하나의 커다란 성공으로 함께 축하해준다. 또 상호 교류를 장려한다. 다양한 전문 지식 및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정말 어려운 문제를 여러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함께 협력한다.
◆김종훈 사장은
김종훈 사장은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전자공학 및 전산학 학사 학위와 기술경영으로 석사를 받았으며 메릴랜드 대학에서 2년만에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공계 출신 기업인이다.
자신이 92년 설립한 ATM 장비 개발 벤처기업 유리시스템즈를 98년 루슨트(현 알카텔-루슨트)에 매각하면서 국내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루슨트에서 광대역 네트워크 부문 사장, 광 네트워킹 사업부문 사장을 거치면서 루슨트의 차세대 광 네트워킹 시스템의 개발, 생산 및 마케팅을 총괄하기도 했다.
2001년 이후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의 전자컴퓨터공학과 및 기계공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고 2005년 4월 벨연구소 사장으로 재합류했다.
현재 미국 국립공학학술원(NAE)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미국 범아시아인상공회의소(USPPACC)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인 10인’에 꼽히기도 했다.
메릴랜드 대학이 수여하는 혁신 명예의 전당(Innovation Hall of Fame)을 비롯, 한국미국학연구회(ICAS)가 수여하는 자유상, 미 공로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상, 올해의 언스트&영 신예 기업가상, KPMG 피트 마윅(Peat Marwick) LLP 하이테크 기업가상, 엘리스 아일랜드 명예훈장, 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상, 올해의 메릴랜드 하이테크 위원회 기업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윤건일기자@전자신문, ben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