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가는 R&D, 독창적인 조직관리, 변화본능이 거대 부품·소재 기업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세상은 광속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주역들은 세트기업이지만 실질적으로 광속 시대를 이끄는 기업은 부품·소재 기업이다. 세계적인 부품·소재 기업이 국내에서 탄생하지 않는 한 우리나라는 IT 강국으로서의 위상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최근 세계 최대 사이즈인 70인치 LCD패널을 출시하고 이를 TV로 만들어 판매 중이다. 삼성전자의 7세대 LCD 라인에서는 하나의 유리원판에서 82인치와 70인치를 모두 2장씩 생산할 수 있다. 당연히 82인치를 만드는 것이 수익성이 더 높고 유리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도 70인치를 생산하는 이유는 핵심소재가 아직까지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LCD를 만들기 위해서는 LCD에 편광판이라는 소재를 부착해야 한다. 그 편광판의 주요 소재가 TAC필름인데 아직까지 82인치까지 대응하는 TAC필름이 나오고 있지 않다. TAC필름은 일본의 후지라는 회사가 80%를 장악하고 있다. LCD의 생산성과 사이즈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특정 소재기업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셈이다.
◇세트의 미래를 결정=전자 제품 가운데 가장 시장 규모가 큰 휴대폰·PC·TV 등의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최대 30%를 넘기 힘들다. 휴대폰 분야에서 노키아가 지난 2분기 39.1%라는 놀라운 시장점유율을 기록했지만 PC는 19.3%의 HP가, LCD TV는 13.1%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한 삼성전자가 1위를 달리고 있다. 아무리 거대기업이라 할지라도 세트에서 1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는 하늘에서 별따기다. 반면에 소재 분야는 5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는 기업이 즐비하다. 그만큼 기술 및 시장 진입장벽이 높다는 얘기다. 또 최근 대부분의 기술 및 제품 혁신은 이들 기업으로부터 이뤄진다. 수직계열화(삼성 및 LG)로 부품·소재 기업을 자신의 우산에 두거나 혹은 철저한 협력사 관리(노키아·HP)로 부품·소재 기업과의 협업체제를 갖추지 않고서는 세트 기업의 성공은 기대하기 힘들다. 삼성코닝정밀유리를 포함한 코닝패밀리가 유리기판에서 59.6%를, 편광판의 원천 소재인 TAC필름과 PVA필름은 후지와 쿠라레이가 각각 80%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LCD에서 휘도를 높여주는 프리즘 필름에서는 최근 10년간의 3M 독점 구조는 깨졌지만 여전히 65%에 달하는 높은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도 액정분야는 독일 기업인 머크가 50%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화학업체인 니치아는 형광등이나 냉음극형광램프(CCFL) 제품의 형광체에서 80%의 시장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예전처럼 위세를 펼치지 못하고 있지만 백색 LED 시장점유율도 24%로 2위와 2배 가까운 격차를 벌이고 있다. 일반 부품의 강자인 무라타제작소의 MLCC 시장점유율은 50%에 이른다. 막강한 시장점유율은 이 기업에 가격 결정권을 쥐어 주고 막대한 수익을 돌려준다. 코닝이 LCD 유리사업에서 50%에 달하는 꿈의 영업이익률을 달성 중이며 3M도 이전보다 낮아졌지만 프리즘시트에서 30% 이상의 영업이익률을 기록 중이다. 무라타제작소도 일반 부품업계에서는 드물게 20%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거두고 있다. 니치아는 지난 2003년에는 50%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했으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익성이 점차 낮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30%를 크게 웃도는 영업이익률을 기록 중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R&D=코닝이 LCD 유리 제조 기술인 퓨전공법을 개발한 것은 지난 1959년이다. 거의 50년 전에 개발된 이 기술은 당초 자동차용 전면 유리용으로 개발됐다. 그러나 경쟁사들이 성능은 떨어지지만 자동차에 충분히 적용할 만한 더 저렴한 기술을 적용한 제품을 공급하면서 결국 코닝은 지난 71년 사업을 포기하게 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코닝은 LCD 산업 시작과 함께 이 기술을 적용한 LCD 유리를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지난 98년에야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기술 개발 이후 40년 만에 흑자를 기록한 셈이다. 머크도 100여년 전에 액정 기술을 발견했으나 20년 전부터야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일본의 화학업체인 신일철화학은 연성PCB에 사용되는 연성동박적층판(FCCL)을 개발한 후 10년 뒤에야 빛을 보기 시작했다. 시대를 크게 앞서가 그 당시에는 골치거리였지만 이 같은 R&D 결과물이 현재의 머크와 코닝을 만든 셈이다. 코닝과 머크는 R&D 연혁만 100여년에 이른다.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국내 기업이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무라타제작소는 뛰어난 기술은 기본이고 관리와 독창성이라는 경영의 3박자를 갖춘 기업으로 평가된다. 무라타제작소는 매트릭스 조직으로 유명하다. 회사를 약 3000개의 책임 단위 조직으로 나눈다. 하나의 조직은 공정·제품·본사 기능이라는 ‘3차원 매트릭스’로 관리된다. 공정별 비용관리, 설비투자 경제성 계산, 설비 생산성 등 과학적 관리 기법을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도입했다. 그 결과 무라타제작소는 공장 가동률이 60%만 넘으면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완성, 부품 업계 최고의 이익률을 내는 업체로 성장했다. 후지포토와 쿠라레이는 끊임없는 변화로 성공한 기업이다. 후지는 사진필름으로 유명한 기업이었으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응용처인 광학 필름 분야로 사업 중심을 이동했다. 미국의 코닥, 독일의 아그파 등 한때 시장을 호령했던 기업이 변화에 뒤처져 생을 마감한 것을 비교하면 후지는 기업의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기본 원리임을 느끼게 해준다. 쿠라레이도 섬유 및 합성수지 분야에서 IT 및 의료·환경 소재 분야로 사업을 전환했다. 국내 섬유 및 화성 기업도 최근 전자 소재 분야로 전환을 추진 중이지만 기본이 약한 탓에 더디게 사업 전환이 진행되는 것과 비교된다.
유형준기자@전자신문, hj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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