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냐 도태냐(Invest and innovate or die).’
150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통신업계 터줏대감 브리티시 텔레콤(BT). 이 회사가 소개한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입부터 벌어진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전제로 한 사업부터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아이디어 프로젝트까지 개요만 들어도 흥미진진하다.
◇가장 혁명적인 투자 ‘21세기 네트워크’=전통적인 통신이 위기를 맞은 요즘, BT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BT 스스로 ‘통신 역사상 가장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시도’라고 말하는 21세기 네트워크 사업이 그것. 세계 최초로 기존 통신망을 모두 걷어내고 IP 네트워크로 완전 전환하는 사업이다. BT가 그동안 성장·인수·합병·동맹 등의 과정을 거쳐 확보한 서로 다른 통신 플랫폼도 하나의 글로벌 IP 네트워크로 통합된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총 100억파운드(19조원), 지난 5년을 기준으로 영국 내 단일 기업으로는 최대 금액이 투자된다. ‘투자냐, 도태냐’라는 BT 내부 슬로건도 이 사업에서 유래됐다. BT가 21세기 네트워크에 사운을 건 것이다.
BT 21세기 네트워크팀은 “지난 10년 동안 영국과 미국을 오가는 통신량은 4배 이상 늘었지만, 매출은 80%로 오히려 떨어졌고 인터넷전화(VoIP) 등은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일용품화하는 통신사업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길이 필요했다”고 역설했다.
21세기 네트워크 사업은 매우 위험하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가야할 길 즉 ‘정공법’을 택했다는 게 BT의 설명이다. BT는 지난해 11월 전 세계 통신사업자 중 처음으로 사우스웨일즈 지방의 전화망(PSTN)을 걷어내고 IP로 전환, 21세기 네트워크의 성공 가능성을 검증해 보였다. 내년부터 노스아일랜드·스코트랜드·잉글랜드 각 지방으로 사업이 확대돼 2011년이면 영국 3000만 회선이 모두 21세기 네트워크로 업그레이드된다.
21세기 네트워크의 파급 효과는 BT라는 기업의 혁신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하나의 단말기로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를 즐기거나, 같은 콘텐츠를 서로 다른 단말기로 손쉽게 즐기는 세상을 맞이한다. 홈허브(Home Hubs)에선 PC·노트북·가전기기·방범 시스템을 중앙 통제해주며 인체정보를 이용한 바이오메트릭스는 더욱 고도화한다.
간단하고 끊김없는 완벽한 통신과 방송의 융합으로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쏟아지는 시나리오까지 그려본다면, 21세기 네트워크는 영국 경제를 부흥시키는 핵심 열쇠 중 하나를 갖고 있는 셈이다. 또, BT가 진출한 30여개 국가의 통신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주문하게 될 것이다. 마이클 카르 BT CSO(최고 과학 책임자)는 “21세기 네트워크 사업의 중요성 때문에 ‘개방과 투명’이라는 대원칙 아래 진행하고 있다”면서 “‘컨설트21’이라는 자문그룹과 ‘스위치드-온(www.switchedonuk.org)’이라는 공익 기구를 발족시키는 등 전략적 결정에도 온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미디어 시대를 선점하라 ‘세이프 시프트 TV’=주말연속극 결과를 내 마음대도 바꿀 수 있는 TV가 나올까. 드라마 주인공과 문자를 주고받는 완전히 개인화한 미디어가 탄생될까. 나한테 꼭 필요한 뉴스만 맞춤형으로 볼 수 없을까. BT는 TV의 미래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R&D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 BT는 사업 영역을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확장함에 따라 BT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이 시급해졌고 이를 위해선 미디어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BT는 전형적인 TV방송과 비디오게임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뉴미디어가 탄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여기에 집중 투자, 새로운 미디어를 선점한다면 BT 브랜드 가치는 자동적으로 올라갈 수 있다. BT의 대표적인 뉴미디어 프로젝트가 ‘세이프시프트(변형·Shapeshifted) TV ’다. 시청자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편집할 수 있는 차세대 미디어 NM2(New media for a New Millenium) 흐름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BT는 유럽 유수의 방송국과 제작센터, 방송아카데미와 손잡고 세이프시프트 TV를 뉴미디어의 대표적인 콘텐츠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1월 핀란드 국영방송에선 세이프시프트 TV 방식으로 제작된 첫 시리즈물 ‘액시덴탈 러브(Accidental Lovers)’가 방영됐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시청자와 모바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올 가을 영국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선보일 전망이다. BT는 100% 개인화된 미디어를 창출하고 이를 선점하기 위해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