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 모 대학 기계공학과 교수 한 분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요즘 대학생들의 기초과학 실력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교수는 요즘 이공계 대학생의 수학·물리 등 기초과학 실력이 과거에 비해 형편없다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공수업을 하는 게 힘들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행렬·미적분·수열·극한 등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유체역학·고체역학·열역학·동역학 등 전공과목을 소화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부 공대는 학생들의 딱한 사정을 알고 방학기간에 전공과목 이수에 필요한 수학·물리 등 기초강좌를 개설하기도 하지만 상당수 대학은 학생들이 기초과학 실력 부족으로 전공과목을 이해하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전공수업이 겉돌 수밖에 없고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도 떨어진다. 이 같은 현실을 조금이라고 극복해 보자고 올 4월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기초과학학회협의체’ 아닌가 한다. 수학·물리·화학 3개 기초과학 분야 학회 중심으로 구성된 이 협의체는 우리 기초과학교육이 붕괴 직전에 있다며 수학·물리·화학 등 ‘풀뿌리 과학’의 복원이 시급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오랜 시간 남북한 과학기술 및 IT협력에 관심을 기울여온 박찬모 전 포스텍 총장은 북한을 방문해 북측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던 경험을 한 모임에서 털어놨다. 포스텍의 석사 과정 이상 학생이 이해할 만한 고난도 수학문제를 북한 학생들이 척척 풀어내고 강의 내용도 빨리 습득해 놀랐다는 것이다. 박 전 총장의 이 같은 전언 역시 과장이 아닐 것이다. 수학·물리 등 기초과학교육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오랜 전통을 북한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지 50주년을 맞았는데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우주에 첫발을 내디딘 것도 기초과학의 경쟁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중국·인도 등 달탐사선 발사 계획을 발표한 국가가 모두 기초과학 분야의 강국이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심각한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 응용과학 분야에는 그나마 정부 지원이 몰리고 있어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수학·물리 등 기초과학 분야를 전공한 학생이나 연구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은 장래에 기초과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이나 연구자는 별종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제아무리 떨어져도 이 분야에 남다른 흥미와 재능을 갖춘 젊은이는 계속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별한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이런 젊은이들의 재능마저 사장시킬 우려가 크다. 기초과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나 연구자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 풍토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짊어져야 할 당연한 책무기도 하다.
문득 북한 젊은이들은 이공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수학 실력이 좋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처럼 심각한 이공계 기피현상이나 기초과학 경시 풍조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의 학생들이 만나 수학·물리·화학 등 기초과학 분야에서 자웅을 겨뤄보는 것은 어떨까. 전 세계 젊은 두뇌들이 실력을 겨룬다는 수학·물리·화학 올림피아드대회처럼 평양이나 서울에서 경시대회를 여는 것이다. 혹시 흥행에 성공한다면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중에는 세계 올림피아드에 남북 단일팀이 참가해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선 기초과학 분야의 용어 통일 필요성도 높을 것 같다. 7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장길수 논설위원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