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과 로봇이 승부를 겨루는 R스포츠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인 투쟁과 오락을 기계로봇에 투사한 R스포츠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벤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e스포츠의 확산이 우리나라를 세계적 게임강국의 반열에 올렸듯이 R스포츠도 대한민국 로봇산업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로봇을 이용한 경기대회는 마이크로마우스 대회가 시초로 꼽힌다. 1980년 영국 포츠머스 공대에서는 ‘꼬마쥐’라고 불리는 소형로봇들이 미로를 찾아가는 마이크로마우스 유럽대회가 처음 열렸다. 비록 로봇의 덩치는 작지만 로봇공학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기술을 모두 집약했기에 교육적 가치를 금세 인정받았다. 마이크로마우스 대회는 로봇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도전해봐야 할 꿈의 무대가 됐다. 또 소형모터·CPU·센서 등 초창기 로봇부품의 개발에도 지대한 기여를 했다. 국내에서는 1983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가 전국 마이크로마우스 대회를 개최한 이래 지금까지 열린다.
로봇대회를 거듭하며 더욱 날쌔고 똑똑해진 꼬마로봇은 어느 날 미로를 뛰쳐나와 축구공을 차기 시작했다. 김종환 KAIST 교수는 1995년 여러 대의 소형로봇을 외부 카메라로 제어해 축구시합을 시키는 데 성공했다. 로봇축구는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고 세계로봇축구연맹(FIRA)이 설립되면서 국제대회로 발전했다. 개별로봇이 아니라 다수의 로봇을 한꺼번에 제어하는 로봇축구는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R스포츠가 됐다. 한국이 로봇축구의 종주국을 자처하자 일본도 자극을 받아 로보컵 대회를 시작했다. 한국식 로봇축구가 스피드와 박진감이 넘치는 게임에 주력했다면 일본의 로보컵은 오락성보다 자율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로봇기술에 초점을 맞췄다. 초창기 일본 로보컵에 출전하는 로봇은 둔하기 그지없었다. 외부에서 로봇을 제어하는 간단한 방법 대신에 각 로봇마다 카메라를 장착하고 자체판단에 따라 공을 모는 까다로운 규정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 목표는 더 큰 성과를 낳는 법. 한국이 로봇축구 종주국을 외치는 동안 일본 로보컵에 출전하는 로봇의 자율주행성능은 매년 향상됐다. 결국 일본의 축구로봇은 두 발로 일어서 공을 차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로봇축구 한일전에서 한국은 선제골을 넣고도 일본에 뒤지는 형국이 됐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는 원격로봇을 이용한 격투대회 ‘로보워(Robowar)’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톱과 망치·칼날로 무장한 로봇전사들이 부딪치는 로보워의 경기모습은 마치 중세 검투사의 대회를 연상하게 했다. 사실 로보워는 로봇기술을 겨루는 대회가 아니라 로봇의 껍질을 씌운 액션폭력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로보워는 BBC의 방송망을 타고 국내에도 소개되면서 유사한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순수한 오락성을 추구하는 로보워가 R스포츠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방송 콘텐츠로서 로봇의 가치를 널리 알려준 것이다.
◇인간형 로봇과 R스포츠=2000년 소니가 인간형 로봇 아시모를 내놓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두 발로 걷는 로봇 제작은 모든 로봇제작자의 엄숙한 사명처럼 보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인간형 로봇을 만드는 방법이 매니아층에 급속히 퍼지더니 2002년 인간형 로봇끼리 격투를 시키는 ‘로보원(Robo-1)’ 대회가 열렸다. 이듬해 로보원은 한국에도 들어와서 아시아 대회로 승격됐다. 심지어 중국정부도 2008년 올림픽 전야행사로 베이징에서 세계 로보원대회를 개최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로봇원은 지금껏 나온 어떤 로봇경기, R스포츠보다도 파급효과가 컸다. 두 발로 걷는 로봇끼리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길거리에서 싸움구경을 하는 듯한 원초적 쾌감을 줬다. 누구나 좋아하는 구경거리인 로보원은 이후 유사한 형식의 대회를 수없이 파생시켰고 R스포츠의 대중화를 앞당겼다. 각종 부품소재의 국산화도 촉진됐다. 지난달 일본 로보컵대회에 참여한 일본팀 대다수가 우리나라 로보티즈가 개발한 로봇관절(액추에이터)을 장착하기도 했다.
인간형 로봇에 기반한 R스포츠는 매니아층에서 출발해 어린이를 비롯한 일반팬을 끌어들이며 미래의 로봇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역할도 한다. 한편 치고받는 로봇대회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은 보다 정교한 동작과 지적 능력을 겨루는 수준 높은 로봇대회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랜드 챌린지=산업자원부가 18일 주최하는 로보월드 행사에서는 8개 로봇대회, 30개 종목이 한꺼번에 열린다. 이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회는 서비스로봇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제1회 그랜드 챌린지(Grand Challenge) 행사다. 로봇에게 주어진 미션은 사람의 음성 명령에 따라 승강기를 타고 정해진 방까지 찾아가서 물건을 찾아오기. 사람에게는 사소한 잔심부름이지만 로봇에겐 대회명처럼 엄청난 기술적 도전이다. 시끄러운 빌딩 안에서 로봇이 사람의 음성 명령을 인식할까. 가까운 승강기는 어떻게 찾고 도어가 열린 순간에 승강기 안으로 잽싸게 이동할 수 있을지. 둔한 로봇팔로 승강기 버튼을 누르기도 쉽지 않고 방번호를 인식할지도 의문이다. 기술적 난이도가 워낙 높아서 주최 측도 1회 대회에서 미션을 해낼 팀은 없으리란 판단이다. 그럼에도 포철은 이번 대회 우승자에게 1억, 성공한 팀이 없으면 내년에 2억, 그 후년에는 3억원의 우승상금을 주겠다며 젊은 로봇공학도를 유혹하고 있다.
그랜드 챌린지를 기획한 정완균(49) 포항공대 기계공학과 교수는 “로봇이 말귀를 알아듣고 정해진 장소에서 물건을 가져오면 5∼6살 아이의 지적능력에 버금간다”면서 “로봇공학적으로 정말 어려운 과제지만 우승자가 나오면 서비스 로봇시장에 혁신을 불러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러한 로봇경기가 계속 발전하면 로봇의 행동보다 지적능력을 겨루는 신종 R스포츠, 예를 들어 로봇장학퀴즈가 인기를 끄는 시점도 올 것이다. R스포츠는 이제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한 시대의 로봇산업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도구로서 그 산업적·문화적 가치를 인정해줘야 한다.
◆인터뷰-장성조 한국로보원위원장
“진정한 R스포츠는 오락성뿐만 아니라 로봇기술과 산업발전에 함께 기여해야 합니다.”
장성조 한국로보원위원장은 지난 2003년 일본에서 인간형 로봇 격투대회인 로보원을 들여와 국내의 대표적 R스포츠 대회로 키워왔다. 요즘 그는 한국·일본이 주도하는 로보원의 경기를 중화권 국가까지 참여하는 국제행사로 키우기 위해 분주하다. 그는 “내년도 베이징 올림픽 전야행사로 중국당국과 세계 로보원대회를 준비 중이며 중국 대학생에게 인간형 로봇을 만들고 격투대회를 하는 법을 전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한국의 R스포츠가 일본과 경쟁 속에서 세계 수준에 올랐으며 이젠 로봇업계와 공생에 더욱 신경을 쓸 때라고 지적한다. “스타크래프트 대회와 프로게이머의 출현이 우리 게임산업에 얼마나 도움을 줬습니까. R스포츠도 로봇산업에 활력소가 되도록 경기제도를 다양화해야 합니다.”
장 위원장은 일본이 오는 2010년 우주공간에서 로봇격투기(로보원)를 하는 계획을 예로 들면서 R스포츠의 확산은 상업성과 하이테크의 이상적 조화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R스포츠도 스타크래프트의 임요환 선수 같은 스타가 나와야 할 때입니다. 로봇회사는 최신기술의 경기용 로봇과 프로게이머를 지원하고 대신 큰 상업적 효과를 얻는 공생관계를 얼른 구축해야죠.”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