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초 취임한 유영환 정보통신부 장관은 향후 통신 정책기조에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 소비자 혜택을 늘리는 데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두 번째로 통신산업 육성에 주안점을 두며 마지막으로 사업자 간 이해관계를 조율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원론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같은 방침은 사실상 기존 통신정책의 근간을 뒤흔드는 상당한 변화다. 산업육성→투자유발→보편적 서비스 확대→소비자 혜택이라는 기존 순환구조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소비자 이익부터 먼저 챙기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를 두고 통신업계는 앞으로 사업자에게 부과되는 역할과 책임이 훨씬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비자 혜택을 늘리는 것과 투자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은 같을지 몰라도 단기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사뭇 다르다”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묘법은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줄어들지 않는 투자부담=KT의 올해 설비투자 계획은 약 2조8000억원. 상반기 집행된 수준은 약 30%다. 남중수 사장이 지난 7월 정통부 장관과 만나는 자리에서 밝혔듯이 올해 투자분은 예정대로 집행될 예정이다. SK텔레콤은 올해 1조5500억원 설비투자 예산 가운데 약 46%인 7200억원가량을 상반기에 집행했다. 예년보다 높은 집행률이다. WCDMA망 조기 투자 이유가 컸다. 올해 통신사업자의 투자는 WCDMA·와이브로·IPTV 등으로 인해 정점을 이뤘다. 해마다 기간통신사업자가 설비에 투자하는 돈은 5조∼6조원. 하지만 내년 투자계획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와이브로나 WCDMA 투자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돼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말로 갈수록 투자를 독려하는 정통부의 메시지는 강해질 게 뻔하다. 정통부 장관이 연말에 통신사 CEO를 불러 설비투자를 예년과 비슷하게 반영하도록 권유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10년 전 IMT2000 사업권이 걸려있을 때만 해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투자를 했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BcN과 같은 차세대 인프라라는 명분으로만 ‘지르기’에는 투자 회수에 대한 부담이 크다.
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통신에서 투자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시장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과도한 선투자는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숙제는 점점 많아지고=내년부터 재판매 의무화가 이뤄지면 투자는 투자대로 하고 시장은 시장대로 열어줘야 하는 부담까지 진다. 수조원의 비용을 들여 통신판에 들어왔지만 재판매 사업자는 망구축 없이 약간의 망이용대가로 통신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이통사의 한 관계자는 “경쟁활성화라는 명분은 좋지만 재판매가 망투자를 하고 들어온 기존 사업자에게도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지를 분명히 알려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부담만 있는 게 아니다. 이제는 소비자 이익까지 직접 챙겨야 한다. 시장에서 경쟁으로 승부하고 평가받는 수준을 넘어선다. 올해 극심했던 통신요금 인하 요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가계통신비 부담이 국회·정치권·시민단체의 이슈가 됐고 결국 정통부가 사업자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요금인하를 단행했다. 막판까지도 시장에 맡기겠다던 정통부는 결국 그 책임을 사업자에게 떠넘겼다. ‘소비자’편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픈 정통부의 마음이 사업자에게는 이중적인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단체의 잇따른 자가망 구축도 통신사업자에게는 큰 위협이다. 지자체의 자가망 구축 난립은 투자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통신망 관리 문제·지역 간 망 연계 문제·중복투자 문제 등을 야기할 수 있다.
◇뛰어놀게 내버려둬라=그렇다고 소비자 이익과 투자활성화·공정경쟁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강제하게 되면 의욕을 떨어뜨리고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사업권을 보장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시장을 위해 수조원을 투자한다면 이미 투기나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경우 농어촌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위해 사업자의 망구축을 강제하지 않는다. 지자체가 망을 스스로 깔고 이를 사업자에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하도록 유도한다.
가브리엘 가우디 프랑스 통신위원회 위원은 “사업자는 시장성만 있으면 언제든지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며 “시장을 만들어주고 사업자가 마음껏 뛰어놀게 하는 게 궁극적으로 소비자에게도 이익”이라고 말했다. 규제완화 속도가 더 빨라져야하는 이유다. 정통부의 규제로드맵 방향 설정은 맞지만 여전히 규제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지배적사업자에 대한 요금인가제가 가장 대표적이다. 마음껏 뛰어놀게 하되 문제가 있으면 사후규제로 강력한 제동을 거는 것이 후유증이 가장 적은 시장친화적 규제라는 게 업계 전문가의 지적이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
◆지속가능한 성장 위해 디지털생태계 어젠다 발굴해야
통신업계가 당면한 과제는 국내 시장의 피 말리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 포화’ → ‘경쟁 심화’ → ‘수익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극복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성장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통신산업의 족쇄를 푸는 것과 아울러 통신산업의 판을 아예 지속성장이 가능한 모델로 바꾸는 게 중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지난 8월 KT가 디지털융합연구원과 함께 발간한 ‘디지털 생태계 미래전략’ 연구보고서는 일반 통신 산업을 넘어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전체를 대상으로 거시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을 도출해 눈길을 끌었다. ‘디지털 생태계’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발전하는 자연생태계의 개념을 빌려 디지털 기술에 의해 구성원 간에 상호 진화가 일어나는 경제사회 관계를 의미한다. 2006 다보스 포럼에서 나온 이래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디지털 컨버전스가 진행됨에 따라 기술·서비스·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고 기존의 수직적 혹은 수평적 가치사슬 체계도 붕괴한다. 통신도 똑같은 변화를 이미 겪고 있는 중이다. 경쟁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위기가 커지고 성장 추이가 지연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트렌드를 주도적으로 파악하고 상생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나간다면 역동적 시장창출이 가능해진다. 이는 통신이면서 통신에 머물지 않는 ‘텔코2.0’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키스톤’ 전략이다. ‘키스톤’은 비즈니스 생태계 환경에서 자사가 속한 생태계의 진화방향을 이끌어나감으로써 종(種) 전체의 성장을 추구하는 핵심종이다. 핵심종이 가치를 창출하고 창출된 가치는 그 종이 속한 사업 영역의 기업과 공유하며 상생의 모델을 만들어나간다. 노키아·구글이 이 전략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통신산업에서 어떤 기업이 키스톤 역할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핵심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통신산업의 미래도 담보하기 힘들다.
정진영기자@전자신문, jychung@etnews.co.kr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통신시장 위한 디지털 생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