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개월 동안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통신요금 인하 압박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던 정부통신부 관계자들은 요즘 꽤나 마음이 느긋하다. SK텔레콤에 이어 KTF·LG텔레콤까지 잇따라 망내 할인에 나서면서 요금경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보조금 경쟁을 요금경쟁으로 바꾸겠다는 정책 취지가 일단은 먹혀든 셈이다. 정통부의 한 관계자는 “추이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요금경쟁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금경쟁에 맞춰 규제기관의 정책과 태도도 더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통부 “요금경쟁으로 바꿔야”=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는 보조금 경쟁을 요금경쟁으로 바꿔야 한다는 정통부의 의지는 매우 강하다. 4조원 규모에 이르는 이동통신 시장의 보조금 경쟁은 단말기 산업을 활성화시킨다는 이점은 있지만 과도한 휴대폰 교체로 인한 낭비와 통신요금 인하 여력을 줄인다는 맹점이 있다. 특히 보조금에 기반을 둔 대리점 중심의 견고한 휴대폰 유통체계는 대리점의 덩치만 키울 뿐 일반 소비자 이익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정통부가 최근 경쟁사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SK텔레콤의 망내 할인을 허용한 것도 보조금에 쓰이는 마케팅 비용을 줄여 요금인하 여분으로 돌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내년에 3G USIM 개방을 준비하면서 의무약정제 도입에 부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정통부 관계자는 “의무약정제를 허용하면 보조금 경쟁이 다시 고개를 들 우려가 있다”며 “여러 가지 변수를 검토하겠지만 다음달 종합적인 결론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요금경쟁 시대 인가제 의미 없어=최근 KT가 망내 할인에 따른 무선의 유선시장 잠식을 우려해 파격적인 유선요금제를 내놨다. 아직 정통부의 인가를 거쳐야 하지만 KT는 자신 있다는 태도다. KT의 한 관계자는 “사전 조율 과정에서 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을 얻었다”며 “SK텔레콤의 망내 할인을 허용해준 마당에 인가해주지 않을 명분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통부가 지배적사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요금인가제가 점점 존재 이유를 잃어갈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정통부는 그동안 후발사업자의 경쟁력 유지를 위한 비대칭 규제의 일환으로 지배적사업자의 요금에 인가제를 고수했지만 앞으로 요금경쟁이 본격화하면 의미가 없어진다. 소비자를 위한 경쟁에서 정부가 개입하면 할수록 시장이 왜곡되고 시장대응이 늦어지는 폐단만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년 3월 보조금 규제가 일몰되는 상황에서 더는 불법이라는 족쇄로 사업자의 마케팅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 정통부가 하루라도 빨리 인가제를 폐지하고 사후규제와 같은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산업육성 방안 등 고민해야=요금경쟁이 본격화할 때 자칫 위축될지 모르는 산업 육성방안에도 고민을 병행해야 한다. 우리나라 통신시장은 선도적인 서비스 개발로 산업을 육성하고 그것이 소비자 혜택으로 귀결되는 구조를 우선시해왔다. 보조금 경쟁이 그 폐해에도 불구하고 휴대폰 산업의 육성과 수출확대, 국부창출이라는 장점을 가져다준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요금경쟁은 당장 이 같은 고리를 흔들 개연성이 충분하다. 유영환 정통부 장관 역시 산업육성이나 사업자 간 이해충돌보다는 소비자 혜택을 가장 우선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요금경쟁이 본격화하고 USIM이 의무약정제 없이 개방된다면 이통사들이 휴대폰에 보조금을 실을 이유가 없어진다. 휴대폰 내수시장 위축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소비자는 단말기를 살 때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한다. 요금경쟁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도 전에 보조금마저 사라지면 상당기간 소비자 비용은 늘어나면서도 산업이 위축되는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소비자를 위하겠다는 정통부 정책은 또다시 ‘이통사들의 배만 불렸다’는 식의 비난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소비자 혜택과 산업육성이라는 양대 과제를 정통부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보다는 연결고리와 파급효과에 더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USIM 개방 시 의무약정제 도입과 같이 산업적 측면을 고려한 유연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