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봄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는 졸업 논문을 준비하면서 달리 할 일을 찾고 있던 스탠퍼드 대학원생에 지나지 않았다. 모자이크 브라우저가 웹에 소개되자 이들은 순식간에 여기에 빠져들었다. 양과 필로는 그들의 홈페이지에 담긴 여러 내용과 관심 있는 여타 사이트를 기억하기 위해 주제별로 사이트와 내용을 분류했다. 그리고 하이퍼링크 리스트를 만든 뒤 웹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이것을 ‘제리의 모자이크 빠른 검색’이라고 불렀다. 이른바 ‘야후’의 탄생이다.
양과 필로는 그들의 디렉터리에 잘 어울리는 이름을 찾아나섰다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사람 모습을 한 짐승의 이름에서 야후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또 야후(yahoo)라는 영어 단어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압축한 ‘yet another hierarchical officious oracle’ 즉 계층적으로 잇따라 나오는 친절한 계시라는 문자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기도 했다.
1996년 4월 12일 야후의 기업공개 시 초기 공모가는 13달러였으나 마감은 33달러였다.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13개월 만에 8억4900만달러라는 거금을 모았다. 이후 야후는 실리콘밸리의 신화가 돼 마이크로소프트·인텔·시스코와 비견될 정도로 거침없는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날은 길지 않았다. 바로 자신들의 스탠퍼드 대학 후배인 레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만든 구글이라는 복병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얼마 전 외신은 야후에서 해외 브랜드 관리와 마케팅을 총괄하던 캐미 더너웨이 CMO가 다음달 2일자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2003년 야후에 합류해 라이프 엔지 캠페인을 전개, 미국 100대 마케터로 꼽혔던 인물이다.
외신은 그의 사임을 예사로운 눈빛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지난 6월 잇따른 실적 악화에 책임을 지고 테리 시멜 최고 경영자가 물러난 후 제리 양이 복귀한 조치의 연장선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비록 3분기 실적이 월가의 기대치를 웃돌았다고는 하나 야후는 후발주자인 구글에 검색시장 1위를 빼앗겨 이를 되돌리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지금 야후가 뛰면 구글은 나는 상황이다. 야후 개혁이 성공해 야호를 외칠 날이 올까.
홍승모팀장@전자신문, smh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