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조정실은 지난해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통신·경쟁·시장개방·교육·정부역량·거시경제 등 우리나라의 6개 분야 규제 현황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2000년 이후 한국의 규제 개선 상황 보고서’가 완료됐다. 이 가운데 지난 99년부터 2000년까지 OECD가 분석해 권고했던 ‘통신 부문 권고안’이 지난해 하반기를 기준으로 얼마나 이행됐는지에 시선이 모였다. OECD 보고서가 일종의 통신 규제 개혁 나침반 역할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향후 개혁 방향도 OECD가 가리키는 곳이어야 할까.
“꼭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의 일침이다. 그는 “정부가 ‘OECD 콤플렉스’에 빠질까 걱정”이라며 “우리나라와 다른 시장·산업·정책 환경에서 쌓은 경험치를 바탕으로 권고하는 통신 규제 개선방안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지난 2000년 OECD가 우리 정부에 권고했던 통신 분야 개선안 10개 가운데 8개가 정책에 반영됐다”며 “나머지 2개를 통해 앞으로 KT의 시내외·전용회선 가격상한제가 실시되고 기타 요금규제가 철폐될 것이며 3세대 이동전화서비스에 주파수 경매제를 도입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정부가 지난 2000년 이후 도입한 △KT의 가입자 선로(로컬 루프) 공동활용제 △장기증분원가방식 사업자 간 상호접속료 산정제 △유무선 전화 번호이동성 제도 등이 모두 OECD 권고사항이다. 최근 추진하는 ‘통신규제정책로드맵’에 따른 △시장 진입장벽 완화 및 허가 조건 축소 △외국인 지분제한 철폐(일부 완화) △통신위원회 독립성 보장 등도 마찬가지다. 또 정부가 중장기적으로 도입을 검토·추진할 이동통신 주파수 경매제도 OECD가 지난 2000년에 권고했던 내용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공정거래위원회·방송위원회·통신위원회 구조 개편을 통해 단일 규제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거나 새로운 규제 틀이 마련되지 않았더라도 IPTV와 같은 융합형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잠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단순히 점유율만을 근거로 삼아 시장 지배적 사업자를 지정하는 게 불합리하며 KT의 공중전화망(PSTN) 가격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면 도매에 한정하고 가격 자체에 대한 행정지도를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게 OECD의 시각이다.
이 같은 내용은 대부분 정부가 추진하는 관련 행정기관 개편방안과 통신방송규제 개선방안에 반영된 상태다. 정보화촉진기금처럼 연구개발(R&D)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통신 설비·서비스 사업자에게 부과하는 기금을 폐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까지 정부 정책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심지어는 내년부터 통신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여부를 판단할 새 기준이 될 ‘경쟁영향평가’의 툴키트도 OECD가 제시한 것이 활용될 전망이다. OECD는 내년부터 규제가 시장경쟁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 뒤 대안(정책)을 발굴하기 위한 설명서인 ‘경쟁영향평가 툴키트’를 회원국에 보급할 방침인데 우리나라에 먼저 시범 적용하기로 했다.
특히 공정거래위원회는 정부 부처와 법령을 협의할 때 OECD의 경쟁영향평가 툴키트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정통부도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할 때 입안단계부터 이 툴키트를 쓸 방침이다.
양환정 정통부 통신방송정책총괄팀장은 “주권 국가로서 OECD 권고안을 정책에 모두 반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다만 규제 개혁에 참고하기 위한 컨설팅일 뿐”이라고 말했다.
◆규제 틀 개혁
“통신과 방송 융합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규제 틀부터 마련할 때다. 정보통신부·방송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통신위원회 각자의 역할로는 통신방송 융합에 걸맞고 소비자 편익을 위한 최소한의 규제를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 내부의 목소리다. 방송통신위원회(정통부+방송위)를 설립하기 위한 산고를 치르는 지금이 공정거래위원회까지 포괄하는 규제 틀 마련의 호기라는 목소리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2004년 KT·하나로텔레콤·데이콤·온세통신의 불공정행위에 벌금을 부과했지만 해당 기업이 정통부 행정지침에 따랐을 뿐이라며 맞서는 충돌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 궁극적으로 규제 중복이나 충돌에 따른 소비자 피해가 가중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통신사업자 간 불공정 거래나 특정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관리하기 위한 일부 기능이 정통부에서 통신위로 이관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정통부에 의존적이어서 소비자 보호에 미흡할 수 있다”는 정부 관계자의 시각도 변화를 꾀할 대상으로 지적된다.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정통부 내에 설립된’ 통신위를 완전히 독립시키자는 것이다.
정통부도 ‘행정 지도’를 자제해 시장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중장기 정책방향을 잡아나갈 방침이다. 이를 통해 공정위나 통신위와 같은 규제 전문기구와 충돌을 피할 구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설비에 기반한 강력한 사전규제를 고수해온 정부가 말처럼 쉽게 서비스에 기반한 시장자율 활성화 정책을 펼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실제로 정부가 도매규제를 비롯한 여러 규제 완화 방침을 발표했지만 늘 ‘설비 기반 유효경쟁에 의한 투자촉진과 산업진흥’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덧붙이는 등 개혁이 요원하다”고 말했다.
이은용기자@전자신문, e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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