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
지난 달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FPD인터내셔널’에서 만난 국내 디스플레이업체 한 임원이 던진 말이다. 그는 ‘FPD인터내셔널’에만 오면 일본이 여전히 두렵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사실 이번 FPD인터내셔널에는 일본은 물론 한국, 대만, 미국 등에서 세계 디스플레이 산업을 호령하는 유수 기업들이 총출동했다.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신제품과 신기술도 풍년을 이뤘다. 업체들은 저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최고 기업으로 평가 받고 싶은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이를 반영하듯 전시회에 참가한 국내업체 한 관계자는 “FPD인터내셔널은 마치 디스플레이업계 ‘수능 시험장’과 같다”고 비유했다.
일본은 지난 2002년 LCD에 이어 2004년 PDP와 OLED에서도 한국에 시장점유율 1위 타이틀을 내줬다. LCD의 경우 2003년부터 대만에도 뒤져 3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지난해에도 일본은 PDP에서만 한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을 뿐 LCD와 OLED에서는 2위 대만에도 밀려 3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 때 디스플레이 종주국임을 자부하며 세계 시장을 좌우하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산업규모 3위의 일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모든 신기술과 신제품이 FPD인터내셔널로 통한다는 사실은 대표적인 사례다. 시장점유율에서 앞선 한국과 대만업체들은 여전히 일본 업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을 떼지 못한다. 심지어 부품이나 장비 구매에서 달러와 함께 엔화를 병행하는 경우도 많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세계 1위를 장악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입김’은 확연하게 세졌다. 하지만 샤프·마쓰시타·소니 등 일본 업체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한국 업체들보다 먼저 벤치마킹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올해 소니가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AM OLED) 양산 계획을 발표한 뒤 국제 전시회마다 AM OLED 신기술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며 OLED 바람이 분 것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쓰시타가 올해 초 무연 PDP를 상용화한 뒤 국내 업체들도 무연 PDP 개발을 서두른 것도 마찬가지다.
산업규모의 열세에도 시장을 주도해나갈 수 있는 일본의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여전히 앞선 기술력을 첫손으로 꼽는다. 여기에 풍부한 시장정보의 장악도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가장 빠른 기술과 정보는 세계 표준을 선도하는 든든한 밑천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이 기술과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데는 디스플레이 종주국으로서 연륜을 무시 못한다. 하지만 산업주도권을 뺏긴 이후에도 기술과 정보를 뺏기지 않는 것은 일본이 세계 디스플레이 업계의 허브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에는 FPD인터내셔널을 비롯해 파인텍재팬, IDW 등 국제 디스플레이 전시회와 학술대회가 계절마다 한 번씩 열리고 있다. 각국의 앞선 신기술과 시장정보가 일본을 거쳐 세계로 전파되는 셈이다. 바꿔 말해 일본 디스플레이업계 종사자들은 가장 먼저 이들을 접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잡는다는 얘기다. 세계 각국의 디스플레이업계 관계자들이 일본으로 몰려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 석준형 차세대연구소장(부사장)도 “아무리 바빠도 빼놓지 않고 FPD인터내셔널을 참관한다”며 “매년 디스플레이 신기술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지 이를 통해 간파하곤 한다”고 말했다.
일본이 구축한 강력한 디스플레이 산업 허브는 자국내 관련 산업으로 파급효과도 만만치 않다. 패널에서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아직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재료·장비산업은 그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앞선 기술과 시장정보를 먼저 접하면서 가장 빨리 신 재료와 장비를 개발하는 선순환 구조가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TV·노트북 등 세트업체들도 이를 기반으로 디자인과 마케팅에서 한발 앞서 나가는 전략을 수립하곤 한다.
세계 디스플레이업계가 소통하는 장을 만들면서 일본 기업들의 브랜드 파워가 높아지는 무형의 효과도 거두고 있다. 일본 기업이 여전히 디스플레이업계 맏형격으로 기술과 정보를 세계에 전파하고, 베푼다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난 3년간 LCD·PDP·OLED시장을 석권하고도 세계에서 진정한 최강자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다. 시장은 장악했지만, 기술과 정보 교류의 장을 제공하는데서는 아직 일본에 뒤져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일본이 부활의 불꽃을 살린 것도 든든한 디스플레이산업 허브가 없었다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올해 한국디스플레이협회가 출범하게 된 배경도 이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최강국으로 거듭나자는 취지가 고스란히 담겼다. 디스플레이협회 이상완 회장은 이를 반영하듯 지난 달 FPD인터내셔널에서 “협회의 방향을 세계 디스플레이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잡고 “향후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해 한국뿐 만 아니라 세계 산업이 함께 발전하는 세계 디스플레이 업계의 구심점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LG경제연구원 한수연 연구원은 “LCD·PDP 등 평판 디스플레이산업이 성숙기에 진입하면서 한국이 후발주자인 대만·중국 등과 기술격차를 유지하는 것도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며 “차별화된 신기술과 마케팅 격차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한국이 일본을 대신해 디스플레이업계 허브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각국 허브 전략
세계 각국은 디스플레이 강국을 향해 다양한 허브 전략을 펼치고 있다. 진정한 디스플레이 강국은 산업·기술·정보 교류의 장 등 3박자를 갖춰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역시 일본이다. 일본은 ‘FPD인터내셔널’과 ‘파인텍재팬’을 15년전부터 개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디스플레이’라는 전문 전시회도 새로 개최하고 있다. 또 매년 10월 세계 디스플레이 학술대회인 IDW(Internation Display Workshop)을 통해 학술교류에도 적극적이다. 일본은 이들 행사를 통해 신기술과 시장정보가 시시각각 일본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구축 중이다.
미국은 세계 디스플레이업계 정보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45년 전통의 SID(Society of Information Display)가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학술대회 중심인 SID에는 매년 600여편의 논문이 발표돼 신기술 전망을 밝힌다. 미국에 세계적인 패널업체가 없지만, AKT·코닥·e잉크 등과 같은 세계적인 장비·재료업체와 원천기술업체가 즐비해 있는 것도 SID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도 미국의 SID와 일본 FPD인터내셔널을 벤치마킹한 IMID를 지난 2000년부터 개최중이다. 역사는 SID와 FPD인터내셔널에 비해 짧지만 산·관·학이 의기투합해 외형적인 규모면에서는 3대 디스플레이 행사로 자리잡은 상태다.
후발주자인 대만·중국도 허브 전략에 본격 가세하고 있다. 중국이 지난해 ‘FPD차이나’를 상하이에서 처음 개최하고, 대만도 올해 제1회 ‘디스플레이 타이완’을 개최했다. 유비산업리서치 이충훈 사장은 “각국이 저마다 자국의 전시회와 학술대회를 강화하면서 다른 나라 행사에는 불참하는 전략도 서슴지 않고 있다”며 “대만과 일본 패널업체들이 SID와 IMID에 참가하지 않는 것도 이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국 중심의 허브 전략이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홍익대 김영관 교수는 “우리나라 기업과 엔지니어들이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표준를 적극 주도하기 위해서는 학술대회나 전시회에서 주도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세계 LCD협의체(WLICC)와 같은 표준화, 환경 등의 현안 해결을 위해 각국의 기업이 연대하는 움직임도 활발해지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한국의 세계 허브 전략은 자체 전시회와 같은 인프라를 강화하며서도 세계 1등 기업들이 국제 사회에 적극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야 진전한 오피니언 리더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장지영기자@전자신문, jya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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