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투자할 만한 벤처가 없다.”
얼마 전 유수의 글로벌벤처캐피털(VC) 한국지사 소장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다는 이 말은 국내 벤처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에 충분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어렵게 버티고 있는 벤처 처지에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나온 이후 많은 이의 원성을 사자 당사자는 개인 블로그에서 ‘벤처정신이 사라지고 창업을 기피하는 문화가 만연되고 있는 상황을 걱정한 말이 부풀려 전달된 것’이라고 수정했지만 벤처인의 가슴에 새겨진 멍은 쉽사리 가실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 인터뷰를 보면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공감하는 부분이 더 컸던 게 사실이다.
지난 2000년 이후 NHN이나 다음의 뒤를 잇는 스타벤처가 부재한 상황에서 VC가 국내 기업에 더 이상 벤처 특유의 도전정신이나 창업 열기를 느낄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미국 IT업계에 불고 있는 ‘10대 창업바람’은 부럽기 이를 데 없다. 요즘 미국은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일컬을 만큼 10·20대 젊은이의 창업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당연하다.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스릴 넘치는 길을 모험심 많은 젊은이가 마다할 리 없다.
레비 역시 창업 이후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VC와 지속적으로 접촉해오면서 미국 IT업계의 엄청난 창업 열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국내 VC보다 더 적극적인 미국 VC의 관심에 당황할 때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넷스케이프’의 창업자인 마크 안드레센, 인터넷 결제시스템 ‘페이팔’의 창업자인 막스 레프친처럼 기업공개나 인수합병(M&A)으로 대박을 터뜨린 젊은 IT 거부마저 새롭게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과거 영예를 뒤로 하고 창업전선에 새로 뛰어든 이유는 ‘성취감’과 ‘경쟁심’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내 IT시장의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과거 벤처 열풍의 수혜자였던 ‘스타 CEO’ 중 누구도 새로운 창업전선에 뛰어들어 밑바닥부터 다시 도전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과연 국내 1세대 벤처기업이 후배에게 남긴 씨앗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구글처럼 협력업체와 공생할 수 있는 에코시스템을 만들지는 못할망정 외형적인 덩치 불리기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이름만 벤처일 뿐 이미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져 대기업과 다름없는 행태만 보여주고 있어 실망스럽다. 새로운 엔지니어를 키워서 업계로 배출해야 할 NHN이나 다음 같은 대형 벤처는 중소기업이 애써 키워 놓은 고급 인력에게 이직을 권유하기 바쁜 모습이다.
나는 20대 CEO의 직함을 달고, 거대 벤처마저 기피하는 검색엔진 개발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무모한 도전 아니냐’는 걱정 어린 시선을 많이 받고 있다. 쉬운 길을 마다하고 왜 고난의 길을 자처하느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벤처는 꿈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말로 설득하곤 한다.
VC가 투자할 만한 회사가 없다는 건 비단 젊은 벤처기업만이 짊어져야 할 멍에는 아닐 것이다.
수익성이나 비즈니스 모델의 완성도를 따지기에 앞서 무모한 열정과 맹목적인 도전정신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기성 벤처의 노력과 벤처문화에 사회적인 관용이 좀더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안상일 레비서치 대표이사 indiana.ahn@reb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