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하에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이 시작된 1967년, 경제기획원은 미국의 한 IT기업으로부터 컴퓨터를 도입한다. 그 것이 바로 국내 컴퓨터 도입 1호로 기록된 ‘IBM 1401’이다. 한국은행 홈페이지 경제통계 자료를 검색해보면 1967년부터 의미 있는 데이터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미국의 IBM은 그해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으로 알려져 있는 극동의 한 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IBM을 설립한다.
올해로 다국적 컴퓨팅 기업이 국내에 정착한 지 40년을 맞았다. 다국적컴퓨팅 기업들은 매년 10% 이상의 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70∼80년대는 속속 한국에 진출, 둥지를 틀었다. 삼성HP(84년), 인텔코리아(89년), 한국썬(91년) 등 글로벌 기업들이 속속 우리나라에 진출했다.
다국적 컴퓨팅 기업은 우리나라 경제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국내 정부와 기업들이 전산화라는 개념이 자리 잡지 않았을 때 그들은 정부와 기업을 설득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 1969년 LG그룹이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의 단행한 전산화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1974년 연합철강의 국내 최초 생산관리 온라인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다국적 컴퓨팅 기업들은 우리 기업들이 해외 거대 기업과 싸울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했고 해외 선진 기업들의 첨단 경영 기법을 전수했다.
다국적 컴퓨팅 기업은 국내 IT인력 육성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들이 배출한 인력만 해도 수만명을 상회한다. 물론 ‘영업을 위한 필요 인력 양성’이라는 측면이 강했지만 결국 이들은 한국 IT 1세대를 인맥을 형성했다. 한국후지쯔는 국내 지사 설립 이후 신입 사원에게 포트란, 코볼 등 랭귀지 중심의 전문 교육과 일본어 수업을 병행했고, 한국IBM도 은행 전산 담당자 교육에 집중, 1980년대 은행전산화 초석을 마련했다. 1984년 설립된 삼성HP는 신입 사원을 대거 충원, IT스페셜리스트로 변모시켰다. 다국적 기업의 피를 받은 IT전문가는 1997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정부와 대기업은 IMF 외환위기 이후 다국적 IT기업과 손잡고 실직자 대상 IT 교육과정을 대거 개설했다. 오라클, MS 인증 자격증도 이후 국내에 본격 도입됐다. 2007년 현재 한국 내 IT 관련 일자리는 총 124만4000개가 있으며,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다국적 기업들이 기여한 일자리로 분석된다. 다국적 컴퓨팅 기업들이 단순히 국내에서 제품 판매나 서비스만 하는 것은 아니다. HP 등 글로벌 컴퓨팅 업체는 한국에서 매년 수 조원이 넘는 부품을 사간다. 이들의 고객은 삼성, LG, 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이다. LCD패널, HDD, ODD가 이들의 주요 구매 품목이다. 물론 국내 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거래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국적 컴퓨팅 회사에 다니는 국내 인력들은 경쟁국에 맞서 한국 제품을 구매하도록 본사를 설득한 노력도 반영된 결과다.
최근에는 국내 연구소 설립도 줄을 잇고 있다. 한국IBM, 한국마이크로소프트, 한국오라클, 한국BEA시스템즈 등이 국내에 R&D센터를 설립했다. 결과물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말 국내에 R&D센터를 설립한 BEA시스템즈는 R&D센터 개소 8개월여 만에 차세대 통신 플랫폼 ‘서비스딜리버리플랫폼(SDP)’을 개발했다. SDP는 통신사업자가 서비스 가입자에게 기존 인프라와 IMS(IP Multimedia System) 인프라를 기반으로 다양한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하는 차세대 플랫폼이다. IBM은 지난 2004년 설립한 유비쿼터스컴퓨팅랩(UCL)으로 텔레매틱스·임베디드SW·전자태그(RFID) 3개의 선도기반 기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국제 공동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오라클 첨단기술연구소’라는 문패로 R&D센터의 문을 연 오라클은 이를 통해 임베디드SW를 중점적으로 개발, 국내 제조업체는 물론이고 솔루션 업체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특히 컴퓨팅 분야는 국내 기업과 다국적 기업간의 경쟁력 차이가 큰 만큼 기술 독점 우려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일부 기업은 국내에 대한 기여보다는 매출 확대에만 신경쓴다는 비판에서 비껴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우리나라 경제의 한 일원으로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1인당 국민소득이 170달러였던 지난 1967년부터 2만달러를 앞두고 있는 올해에 이르기까지 다국적 기업은 우리 경제의 조력자였다. 우리 경제가 어려움을 겪었을 때 활력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했고 경제가 살아났을 때 함께 웃었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의 홈페이지에 있는 회사 소개처럼 ‘한국에서 설립된 한국기업’이라는 말이 오늘의 다국적 컴퓨팅 기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유형준기자@전자신문, hj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