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토) 저녁 한국·중국·일본의 로봇정책 담당자들이 포항공대 국제관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세 나라의 로봇 담당자들은 다음날 제2회 한·중·일 로봇워크숍이 예정됐는데도 전자신문사가 주관한 ‘동북아 로봇공동체를 위한 협력방안’ 특별 좌담회를 갖고 밤늦도록 토론을 벌였다.
한국과 중국·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세 나라는 역사·문화적으로 밀접하고 경제교류도 증가일로지만 이런저런 역사적 앙금과 정치현안은 국가 간 협조체제에 늘 장애요소로 작용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중·일의 로봇 담당자들이 모여 지능형 로봇산업의 협력방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것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만 발표하는 일반 워크숍에서는 기대하지 못할 성과였다.
이날 좌담회에는 오상록 정보통신부 로봇PM과 송정수 정통부 산업기술팀장·차오 슈에쥔 중국 과기부 첨단기술개발과장·경산성 국장을 지낸 나가노 히로시 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 교수 등 10명의 전문가가 참석했다.
◇배일한 기자=한·중·일이 지능형로봇 분야에서 협력하려면 무엇보다 신뢰가 필요하다. 중국정부는 외국기업을 거쳐 이동통신·무선랜 등의 첨단기술을 습득하면 태도를 돌변해 자체 표준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었다. 중국과 협력하는 외국 로봇업체도 비슷한 상황을 겪을 가능성은 없나.
◇차오 슈에쥔 과기부 과장=(크게 웃으면서) 그건 오해다. 이동통신은 워낙 성숙한 시장이어서 중국정부가 표준문제에 개입했지만 지능형로봇은 아직 초기 단계가 아닌가. 진화할 여지가 무궁무진한 지능형로봇시장에 정부가 나서서 특정표준을 고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왕 티엔미아오 베이항대 교수=중국은 노동력이 많아서 로봇수요가 적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자녀 갖기 정책의 부작용으로 젊은이 2명이 노인 4명을 모시는 기형적 사회구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결국 노인복지를 위한 실버로봇의 개발이 절실한 상황이다. 중국은 이 분야에 기술력을 갖춘 한국·일본의 로봇기업과 제휴를 원한다.
◇오상록 PM=세 나라가 모두 출산율이 극도로 낮아 노인복지가 주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핵심적인 로봇시장이 되고 있다. 실버로봇은 노인에게 육체적 도움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도 함께 주는 것이 필요하다. 로봇을 구매한 후에 노인의 웃음 횟수가 증가됐다면 그 자체가 삶의 질을 향상시킨 것이다.
◇배일한=초기 지능형로봇시장은 국가별로 독특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은 네트워크 로봇, 일본은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 주력하는 배경이 뭔가.
◇사토 도모마사 도쿄대 교수=일본이 휴머노이드 로봇에 주력한 것은 나름대로 기술적·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두 발로 걷는 로봇은 제작과정에서 다양한 HW와 SW가 필요해 로봇플랫폼의 기술축적에 적합했다. 또 로봇이 사람을 도울 때 바퀴보다 두 발로 서는 편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나가노 히로시 GRIPS 교수=일본의 휴머노이드 개발은 1950년대 만화영웅 아톰의 영향이 컸다. 제대로 된 로봇이란 두 발로 걸어야 한다는 이미지가 아톰에서 나왔다.
◇오상록=한국의 네트워크 로봇은 IT환경에 적응력이 빠른 얼리 어답터 성향이 주 고객층이다. 한국 젊은이는 휴대폰 기능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1년에 한두 번은 바꾸는 사례가 많다. 네트워크 로봇을 작업도구가 아닌 신형 전자제품과 비슷한 컨셉트로 대하는 고객반응이 시범사업을 거쳐 여러 번 관찰됐다.
◇차오 슈에쥔=각 나라가 지능형로봇 개발에서 조금씩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 중국은 지능형로봇을 개발할 때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아끼는 존로애유의 철학에 바탕을 둔다.
◇왕 티엔미아오=실버로봇은 대화(言)와 육체적 평안(水)을 함께 제공해 노인의 지루함(炎)을 해결해야 하므로 중국에선 ‘담담(談淡)로봇’이라 부른다.
◇배일한=재미있는 표현이다. 일본은 로봇부품기술, 한국은 IT인프라와 로봇 비지니스모델, 중국은 로봇의 저가 양산능력과 막대한 시장규모에서 압도적 우위를 갖고 있다. 세 나라가 지능형로봇 분야에서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모델은 무엇인가.
◇사토 도모마사=기독교 중심의 서구문화와 달리 한·중·일은 로봇을 배타시하지 않는 온건한 로봇관을 공유한다. 공통의 로봇문화와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세 나라가 지능형로봇 기술의 표준화를 추진하고 이를 기반으로 동양인의 정서에 맞는 로봇서비스를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한·중·일을 하나의 로봇시장(동북아 로봇공동체)으로 키워야 미국·EU와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것이다.
◇고토쿠 데스오 AIST 그룹장=동감이다. 한 나라의 힘만으로는 어렵겠지만 한·중·일이 로봇 분야에서 보조를 맞춘다면 MS 같은 대기업에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 당분간 지능형로봇 시장에서 세 나라는 경쟁보다는 상호 협력이 훨씬 필요한 시점이다.
좌담회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토론내용이 기대 이상으로 유익했다고 평가했다. 동북아 로봇공동체는 너무 앞선 기대지만 적어도 한·중·일이 로봇 분야에서 보조를 맞출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분, 로봇 ‘로(勞)’자를 아십니까?”
이날 좌담회에서는 로봇 기술의 표준화에 앞서 한자문화권에 속한 세 나라가 로봇의 한자어부터 통일하자는 한국 측 제안이 큰 반향을 끌어냈다.
중국의 국어사전에서 robot은 기기인(機器人:기계인간)이라고 표기한다. 일본인은 로봇을 인조인간(人造人間)이라고 부른다. 나름대로 센스 있게 지어낸 한자어지만 서양에서 건너온 로봇(robot)의 본래 의미와는 큰 차이가 난다. 로봇은 본래 체코어로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robota’에서 나왔다. 즉 서구인은 로봇이란 인간을 위해 ‘노동을 해주는 존재’라는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반면에 동양권에서 로봇이란 ‘사람처럼 생긴 기계’란 인식이 훨씬 강하다. 로봇의 중국식 표기인 ‘機器人’, 일본식 표기 ‘人造人間’만 봐도 로봇의 외형적 이미지만 부각될 뿐 ‘노동’이란 본래의 개념은 빠진 어색한 한자 번역이다.
요즘 일본의 로봇개발이 다소 정체된 배경에는 ‘인조인간’이란 촌스러운 이름 탓도 있다. 미국이 무인자동차를 비롯한 실용적 로봇기술로 앞서가는 동안 일본은 사람에게 아양을 떠는 휴머노이드 로봇(인조인간) 개발에 지나친 역량을 소모했다. 이름은 그 사물에 관한 상상력의 한계선이다. 동양 3국이 각각 다른 로봇명을, 그것도 왜곡된 의미로 쓰면서 로봇을 향한 서구인의 상상력을 따라잡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날 한국 대표단은 ‘수고할 로(勞)’자를 로봇을 지칭하는 ‘로봇 로(勞)’자로 쓰자고 제안했다. 한자어 ‘勞’는 그 뜻(work)과 음(ro)이 강제노동을 나타내는 로보타(robota)와 쉽게 통하기 때문이다. 로의 일본식 발음도 로(ro), 중국식 발음은 라오(lao)로 불리기에 동양 3국의 로봇표준단어로서 손색이 없다. 한·중·일 세 나라가 로봇을 자신의 문자로 정확히 쓰고 서로 소통한다면 로봇세상의 미래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포항=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