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이다.’
일본 반도체업계는 2001년 후발국의 시장 잠식이 겉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공동 연구개발(R&D)이라는 해법을 내놓았다. NEC·히타치 등이 주도한 ‘공동 R&D’의 핵심은 기업 간 경쟁력의 핵심인 ‘설계’는 개별기업이 추진하되 차별화가 어려운 제조 공정기술은 함께 개발해 공유하자는 것.
그동안 소자업체별로 제각각 진행돼오던 R&D를 한곳에 집중하면서 시간·인력·자금의 중복 투자는 급속히 사라졌다. 또 제조 공정의 표준화가 실현되면서 장비·소재업체의 중복 R&D 투자도 없어졌다. 결국 추락하던 일본 반도체업계는 ‘공동 R&D’를 기반으로 기술 경쟁력을 빠르게 확보하며 부활의 불꽃을 살릴 수 있게 됐다. 최근에는 정부, 소자 대기업, 장비·재료 중소기업 등이 대거 참여한 공동 R&D 컨소시엄이 잇따라 발족하면서 ‘공동 R&D’는 ‘윈윈전략’의 대명사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일본의 부활, 대만의 맹추격에 샌드위치 신세가 된 한국 디스플레이업계도 일본 반도체업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삼성과 LG로 양분돼 비슷한 기술을 양쪽에서 개발하면서 허비하는 비효율성을 이제는 과감하게 던져버릴 때가 됐다.
공동 R&D는 최근 상생협력의 주요 테마로 떠오른 패널과 장비의 교차 구매를 손쉽게 한다는 점에서도 진일보한 상생 프로젝트로 각광받고 있다. 공동 R&D 성과를 공유하면서 패널·장비·재료의 표준화가 저절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패널 수요기업에 맞춰 단일 장비와 재료를 따로따로 개발하면서 낳은 폐단은 적지 않다. 장비·재료업체가 비싼 R&D 비용을 지급해 첨단 제품을 개발하더라도 수요처는 한곳으로 한정돼 R&D 비용 회수조차 힘들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호령하는 국내 패널기업이 공동 R&D로 세계 표준화를 주도하면서 얻는 산업 파급효과도 만만치 않다. 한국의 장비와 재료가 표준으로 채택되면서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LCD·PDP시장이 성숙기에 진입하면서 패널업체 간 공동 R&D는 더욱 시급해지고 있다. 진화된 공정기술을 경쟁국보다 한발 앞서 개발해 가격경쟁력에서 우위를 유지해야 하고 나아가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에서도 선점효과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석준형 삼성전자 차세대연구소장은 “언제 어디에서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는 완전히 새로운 공정기술을 요구한다”며 “이런 기반 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장기 계획 아래 업계 공통의 과제로 준비돼야 경쟁국보다 빨리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국내 반도체 산업 분야에서는 이 같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3∼5년 단위의 장기 공동 R&D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디스플레이업계도 올해 협회 출범을 계기로 공동 R&D전문위원회·특허협력전문위원회·표준화전문위원회 등이 속속 가동되며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문제는 아직 국내 업계에는 생소한 공동 R&D를 무턱대고 도입했다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으로 처음부터 표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는 공동 R&D는 낮은 단계에서 서로 공감대를 확보해나가며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연착륙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개별기업의 R&D 성과를 공유하는 특허공유부터 시작하고 이를 기반으로 복수의 수요 대기업과 복수의 장비·재료업체가 참여하는 대형 컨소시엄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공동 R&D의 대상분야는 국내 디스플레이업계가 가장 취약한 재료·장비 분야에 먼저 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LCD·PDP 광학 소재, 필름 등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제품이 국산화되면 패널 대기업의 가격경쟁력 확보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차세대 디스플레이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는 기반 기술에 대한 공동 연구도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OLED 청색 인광재료·플렉시블 디스플레이 양산용 롤투롤 공정장비 등을 국내에서 먼저 상용화하면 OLED·플렉시블 디스플레이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에서도 한국은 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을 전망이다. 이를 위해선 정부의 강한 의지·예산 지원도 중요하다고 업계 관계자는 입을 모으고 있다.
◆정부 R&D 지원 과제
기업 간 공동 R&D 활성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R&D 지원 정책의 변화도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개별기업의 단기 제품 상용화에 초점을 맞춘 지원과 투자에서 벗어나 국가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그동안 패널 공정개발에 70% 이상 집중돼온 R&D 예산을 재료·부품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재료·부품은 원천기술 확보가 관건인만큼 R&D사업의 리스크가 크지만 향후 성과를 업계가 모두 공유하고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재료·부품업체에서 패널업체까지 고루 성과가 돌아갈 수 있는 수평적 R&D 과제 발굴이 중요해진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그동안 단기적인 성과가 보장되는 근시안적인 지원에서 △미래지향적 기술 △기반 지향적 기술 △연계 가능 이종기술 △공동개발 가능 기술 등 ‘고 위험-고 수익’의 지원 방식을 과감하게 도입하는 자세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반면에 지금까지 정부가 부담한 상용 제품 개발 프로젝트는 민간 기업이 자체적으로 연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공동 R&D 효과 제고 방안
디스플레이업계 공동 R&D는 특허 협력·공동 구매 등과 병행돼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일본 업체들은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자국 기업의 특허 공유는 물론이고 대만·중국업체와 특허 협력도 단행하는 추세다. 일본 PDP업계는 ‘HPPL’이라는 특허풀 운영법인을 별도로 설립해 한국 PDP업체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체계적으로 진행 중이다.
또 일본 샤프는 대만 치메이옵트로닉스(CMO)·CPT 등과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해 불필요한 R&D과정을 없애고 핵심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펼치고 있다. 공동 R&D에서 특허 협력까지 병행하면 R&D 효율을 더욱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발국의 기술진입 장벽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셈이다.
재료·부품의 공동 R&D로 공동 구매를 연계하면 패널업체들은 가격경쟁력을, 재료·부품업체들은 단기간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동 R&D 추진방향
<1단계> <2단계> <3단계>
특허공유 -----> 대형 컨소시엄 ------> 연구거점(기관) 설립
(개별기업 R&D성과 공유) (복수 수요대기업+복수 장비·재료업체) (연구원 파견해 공동 연구)
장지영기자@전자신문, jya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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