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혁명에는 두 가지 방법론이 있다. 혁신적인 로봇제품이 나타나 점차 대중화되는 탑다운(top-down) 방식의 로봇혁명이 있고 익숙한 일상 속에 로봇기능이 확산되면서 세상을 바꾸는 바텀업(bottom-up) 방식이 있다. 에볼루션로보틱스는 낮은 곳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로봇혁명을 꿈꾸는 회사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파사데나에는 벤처투자계의 거물인 빌 그로스 회장이 지난 96년 설립한 창업보육센터 ‘아이디어랩’이 있다. 1930년대에 지어진 낡은 공장건물을 개조한 센터 내부에는 3차원 성형 프린터·태양열 발전기 등 기상천외한 아이템에 승부를 거는 벤처기업 16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에 입주한 벤처 중 에볼루션로보틱스(이하 에볼루션)는 지능형로봇 분야의 유망주로 빌 그로스 회장이 각별한 관심을 쏟는 기업이다.
에볼루션은 로봇 완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로봇소프트웨어(SW) 분야에 특화된 전문기업이다. 이 회사의 로봇SW패키지인 ERSP는 비전(바이퍼·ViPR)·내비게이션(vSLAM)·인터액션·아키텍처로 구성돼 장님 로봇의 눈을 뜨게 하고 새로운 활동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100여곳의 기업·연구소가 신형 로봇제품을 개발할 때 에볼루션의 ERSP를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 에볼루션의 핵심역량은 영상패턴인식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카메라 한 대로 거리측정을 하는 비전기술을 처음 고안한 데이빗 로우 교수와 같은 로봇석학이 회사의 기술고문으로 줄줄이 포진하고 있다. 앞선 기술력 덕분에 이 회사의 로봇SW는 세계 최초의 상용제품으로 시장을 선점하게 됐다. 하지만 에볼루션의 진정한 강점은 로봇전문가가 흔히 빠지는 기술지상주의에서 탈피해 가격과 실용성을 함께 고려할 줄 아는 균형잡힌 제품전략이다.
에볼루션이 지난 2004년 선보인 적외선방식의 위치인식솔루션 ‘노스 스타’는 대량으로 주문하면 납품가격이 개당 30달러까지 떨어진다. 당시 연구실에서 유사한 위치인식기능을 구현하는 데 수천, 수만달러의 비용이 들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가히 혁명적인 가격파괴가 이뤄진 셈이다. 지난 10월 홍콩의 완구업체 와우위는 2009년 선보일 로봇완구 3종에 성능이 더 향상된 ‘노스 스타 2.0’ 버전을 채택하기로 에볼루션과 계약을 했다. 장난감에 실내 위치인식기술을 접목시키는 세계 최초의 사례다. 마리오 뮌헨 부사장은 “로봇기술의 대중화를 이루려면 연구실에서만 돌아가는 값비싼 제품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모든 로봇SW와 부품은 단순하고 신뢰성이 높고 싸게 만든다는 원칙을 따른다고 설명했다. 주요 로봇기능을 저렴하게 구현해야만 고객사가 만든 새로운 로봇제품이 시장에서 실패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 또 로봇제품이 성공할 때도 이익을 극대화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값싸게 만들다 보니 에볼루션의 위치인식솔루션 노스 스타는 정밀도에서 국산제품보다 못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각 로봇애플리케이션이 요구하는 최소 사양의 성능을 가장 싸게 구현한다는 에볼루션의 전략은 국내 상황에서도 꽤 설득력이 있다.
에볼루션이 지난 수년간 로봇SW 분야에서 구축한 터무니 없는 가격경쟁력은 로봇기술의 대중화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휴대폰·완구에도 로봇기술이 슬그머니 적용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된 것이다. 실제로 에볼루션의 바이퍼 비전기술은 소니의 ‘아이보’와 홍콩 와우위의 로봇 장난감에 탑재돼 주인을 알아보는 로봇강아지를 만드는 데 활용됐다. 또 일본 NTT도코모의 휴대폰에도 250만대 이상 채택되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요즘 휴대폰으로 광고화면을 찍어 전송하면 모바일 경품을 주는 신종 마케팅 기법도 에볼루션이 자랑하는 비전기술에서 나왔다. 실제로 카메라 앞에서 그림책을 펼친 뒤 특정 페이지를 비스듬히 기울이거나 구부려도 형태 인식에 문제가 없었다. 로봇세상의 중심을 꿈꾸는 에볼루션의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위치인식센서의 가격경쟁력을 십분 활용한 청소로봇까지 직접 제작해 룸바의 아성까지 넘본다는 계획이다.
뮌헨 부사장은 “한 대형가전업체와 공동으로 청소로봇을 개발 중이며 내년 초 출시될 예정”이라며 “우리 로봇기술을 채택한 정보기기가 내년에는 1000만대에 근접하게 된다”고 말했다. MS의 로봇SW시장 진출에 위협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ERSP는 로봇 대당 4달러 이하의 낮은 가격에 공급이 가능합니다. 비전·항법기능도 기본으로 제공되고 윈도·리눅스 버전까지 고루 있지요”라고 강조했다. 반면에 MS의 로봇SW인 MSRS는 윈도환경만 지원하고 각종 부가기능도 외부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많은 고객사와 상대했을 텐데 지능형 로봇의 킬러앱이 어디에서 나올 것 같냐고 질문했다. 파올로 퍼자니언 CEO는 잠시 생각하다가 무인자동차와 실버로봇을 가장 유망한 양대 로봇시장으로 꼽았다. “자동차는 이미 자율로봇으로 진화하기 시작했고 노령화 사회에서 필요한 실버로봇의 종류와 수량은 계속 늘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노인의 생활환경은 템포가 매우 느리기 때문에 기민하지 못한 로봇도 큰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회사 측은 오는 2010년까지 비전·내비게이션 등 로봇기능을 원칩화한 다음 가전제품·휴대폰·자동차 등에 접목시켜 새로운 시장수요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퍼자니언 CEO는 “가전제품과 자동차 등 일상 속에 로봇기술이 지금의 마이크로칩처럼 대중화돠면 우리의 생활모습도 크게 바뀔 겁니다”고 전망했다. 로봇과 평범한 사물의 경계를 허무는 에볼루션의 낮은 행보는 로봇혁명의 또 다른 모습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인터뷰=파올로 퍼자니언 에볼루션로보틱스 CEO
“모든 일상생활 속에 로봇기술을 넣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파올로 퍼자니언 에볼루션 로보틱스 CEO는 지난 2000년 미국에 건너온 아르메니아 출신의 이민자로서 빌 그로스 회장과 만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인물이다. 그는 로봇시장 활성화에 가장 큰 걸림돌로 너무 높은 성능 대비 코스트를 지목하면서 에볼루션의 고기술+저가전략이 로봇혁명을 앞당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 “창업당시만 해도 로봇산업이 이렇게 부각되리라 생각지 못했다. 지금까지 상상한 이상으로 회사운영이 잘 풀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MS의 로봇사업 진출을 의식한 듯 단일상품인 PC와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지닌 로봇시장은 성격이 다르다고 거듭 강조했다.
“빌 게이츠는 PC의 다음 버전이 로봇이 될 거라 했지만 제가 보기엔 로봇은 차라리 가전제품과 닮은 바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PC산업에서 인텔이 가진 우위를 로봇시장에서 재현하는 것이 장기적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로봇업계에 대한 립서비스도 잊지 않았다. “한국은 매우 독특한 시장위치에 있으며 지능형 로봇산업을 키워낼 능력이 충분합니다. 에볼루션은 한국 로봇산업의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겠습니다.” 파올로 퍼자니언 CEO는 로봇기능이 의자에서 밥솥까지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삶의 방식이 개선되는 상향식 로봇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파사데나(미국)=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