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욱 코콤 사장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CEO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기업을 설립, 30년 동안을 CEO로 살아온 터라 CEO로서의 생활이 몸에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회사에서 내보낸 직원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를 대하는 직원들은 왠지 모를 강한 카리스마에 위축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푸근한 느낌을 받는다. 직원들에게 ‘평생직장’을 만들어주는 것을 30년 CEO의 경영철학으로 굳게 믿고 실천해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서울 염창동 코콤빌딩 사장실에서 그의 CEO 인생을 들어 보았다.
◇거절하지 못한 부탁
“일을 다시 하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찾아와 부탁을 했다.
“모르는 처지도 아니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성욱 사장의 CEO 입문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벌써 32년 전의 일이다. 당시 고 사장은 S사를 다니다 나와 그 회사의 인터폰 대리점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다니며 수주를 해왔는데 그 회사가 덜컥 부도를 내버렸다. 수주한 물건을 받을 일이 요원해 난감한 상황이었다. 채권단에 제품이 안되면 금형이라도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을 당한 직후였다. 그러던 차에 직원들이 찾아와 부탁을 했고, 길이 보일 것만 같았다.
“S사는 왜 부도를 낼 수밖에 없었을까?”
처음부터 고민이 밀려왔다. 막상 일은 벌여 놓았지만 멋지게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객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 보자.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 고 사장은 마케팅 전략부터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고객들의 불만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불량제품이 의외로 많았다. 또 외장이 알루미늄이라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찌그러지거나 흠이 났다. 배터리도 밖으로 연결돼 있어 보기 흉했다.
“당시 나와 있는 인터폰을 관찰하다 보니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문제점으로 파악됐다. 이에 대한 불만만 해소해 주면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 사장은 당장 실행에 옮겼다.
제일 먼저 ‘불량이 한 대 나오면 두 대를 보상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불량을 줄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알루미늄으로 씌웠던 외장 케이스를 주물로 튼튼하게 만들고 배터리도 내장시켜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 같은 변화의 노력은 12개 기업 가운데 꼴찌로 시작한 한국통신(코콤의 전신)을 불과 1년 만에 업계 2위의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숨가쁘게 걸어온 CEO 인생 30년
그렇게 시작한 CEO 생활이 어느덧 32년째로 접어들었다.
“벌써 30년이 넘었다”며 허허 웃는 그의 얼굴에는 한 평생을 가꿔온 기업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사실 그는 직원들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끝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다그치는 스타일이다. 코콤에는 부서마다 각기 다른 평가지표에 근거한 평가차트가 붙어 있다.
모든 평가는 철저하게 그 평가차트 기록으로 이루어진다. 평가의 결과는 곧바로 연봉과 성과급으로 이어진다. 어설퍼 보이는 중소기업을 세계적인 홈네트워크 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코이바나 벤처연합 등에 나가보면 전부 젊은 사람들이다. 외국에 나가서 보지 않으면 비전제시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나이 먹어서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하다 보니 정말 이 사업이 힘들다.”
지난 30년간 CEO라는 직책은 늘 그를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했다.
“늘 전문서적을 탐독해 왔다. 전문서적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CEO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일념과 고충을 담은 그의 고백(?)이었다.
그러는 동안 인터폰으로 시작한 사업 아이템은 비디오폰과 디지털 CCTV, 비디오도어폰, CCTV 카메라 모듈 등으로 발전해 나갔다. 모두 ‘디지털 홈’으로 연결되는 제품이었다. 이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현재 주력하고 있는 홈네트워크 사업의 근간이 됐다.
특히 89년 개발한 비디오도어폰과 CCTV 카메라 모듈은 코콤 브랜드를 세계 시장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는 지금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만드는 비디오도어폰에 코콤의 CCTV 카메라 모듈이 들어가 있다”며 자랑스러워 한다.
그가 제시한 비전이 매번 성공만 거둔 것은 아니었다. 특히 97년부터 7년간 야심차게 추진했던 디지털카메라 사업은 그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실패작이었다. 그는 뒤늦게야 “미래의 시장만 보았지 세계적인 대기업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벽을 보지 못한 탓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덕분에 쓴 맛을 봐야 했지만 중소기업이 집중력을 분산시키면 안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
◇역경과 고난의 연속
코콤의 옛 이름은 KT의 그것과 동일한 한국통신이다. 설립연도는 코콤이 1976년으로 KT보다 5년 정도 앞선다. 하지만 코콤의 한국통신은 KT의 한국통신과 헷갈린다는 이유로 90년대 중반에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때 한국(KOREA)과 통신(Communication)을 합해서 만든 이름이 KOCOM이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새로 만든 브랜드가 국제 무대에서는 더 잘 통했다.
직원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인터폰을 만드는 중소기업인데다 회사 위치도 부천이다 보니 젊은 인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다. 모든 중소기업이 느끼는 그대로다. “가능한 방법은 모두 강구해 봐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IMF가 한창이던 99년 사옥을 부천에서 서울 염창동으로 옮겼다.
핸디캡을 하나라도 극복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유능한 직원을 유치하기가 쉽지 않다. ‘평생직장’을 내걸고 직원 자녀에 대해서는 대학교까지 모든 학비를 전액 제공해 주고 있지만 중소기업이 꿈많고 유능한 젊은 인재를 붙잡아 두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그때 사둔 빌딩이 회사의 자산가치를 높이는 데는 더 없이 좋은 역할을 했다. 이를 두고 고 사장은 “제조업체로서는 씁쓸한 일”이라며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망설여진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대기업들의 공세도 그가 이겨내야 할 높은 벽이다. 하지만 방법이 안보인다. “애써 좋은 아이템을 개발해 시장을 열어 놓으면 대기업이 잠식해 들어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대기업이 상도의는 지켜줘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호소에는 대기업 공포증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잠시간의 휴식, 생각을 바꾸다
‘평생직장’을 모토로 기업을 운영해 온 그의 경영철학은 직원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서 시작된다. 직원들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30년 동안 단 한번도 꺼낸 적이 없다. 지인들은 “물은 고여 있으면 안 된다”며 핀잔섞인 조언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안정된 직장을 보장해줘야 직원들이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편안하게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잘라버렸다.
그는 CEO의 임무를 “회사와 직원에 대한 비전 제시,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인사, 직원들이 잠재의식까지 최대한 활용해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반 조성 등 3가지”라며 간략하게 정리한다. 그가 30년간 지켜온 경영철학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효율을 강조해야 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일본 스타일과 미국 스타일을 반반씩 섞은 개념으로 기업문화를 바꾸고 싶은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조만간 그의 입에서도 ‘그만두라’는 말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생각의 변화는 휴식에서 왔다. 3년 전 그는 몸이 아파 입원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쉬어보는 한 달 가까운 휴가였다.
“잠시 멈춰서서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것이 느껴졌다. 지난 27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는 모처럼의 휴식을 통해 “좀 더 일찍 일을 멈추고 밖에서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회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반성을 했다. 이후 그는 분기에 한 번씩은 무조건 쉰다. 주말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사흘 정도는 일과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올해는 아예 회사 경영방침을 ‘마인드 변화’로 잡았다. 기술이 빠르게 변하고 사업 아이템도 변하는만큼 직원들 마인드도 바꿔보자는 취지다.
가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키로 했다.
“그동안 집은 잠만 자고 나오는 여관과 다를 바 없었다. 미안할 뿐이다.”
세상 대부분의 가장이 그렇듯이 고 사장도 가족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지난해 말에 처음으로 부부동반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집사람이 ‘환갑이 되고서야 철이 들었다’고 놀렸다.”
고 사장은 오랫동안 일속에 묻혀있던 일갑자 깊이의 CEO 내공을 담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고성욱 사장은
고성욱 사장은 1949년생으로 지난 1976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인터폰 제조사인 한국통신을 설립해 30년 이상을 IT업계에서 외길 인생을 살아온 원로 CEO다.
1987년에 국내 최초로 비디오폰을 개발해 출시하고, 80여개국에 수출을 해오면서 해외 시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89년에 디지털 CCTV용 카메라 모듈과 비디오도어폰을 개발해 건설사에 빌트인 제품으로 공급하는 동시에 해외 각지에 수출, 홈오토메이션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2000년부터는 홈네트워크 전문 기업으로의 변신을 시작해 2006년에는 산자부 주관의 ‘세계일류상품’ 부문 차세대 일류상품 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승승장구해 왔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140억원이 늘어난 790억원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김순기기자@전자신문, soonk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