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장비 업체들이 해외에서와는 달리 국내에서는 수익성 저하와 유지보수 비용 부담, 짧은 납기일정 등 3중고에서 벗어날줄 모르고 있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통신사업자들이 실시하고 있는 최저가 입찰제가 장비업체들의 출혈경쟁을 불러오면서 어렵게 따낸 공급건이 역마진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또 워런티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유지보수 비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 관행이 팽배해 있어 장비 업체의 손실 폭을 더욱 키우고 있다. 통신사들의 4주에 불과한 짧은 납기 정책도 장비업체에 재고 부담을 떠넘기는 결과로 이어져 가뜩이나 어려운 중소 장비업체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통신사업자들이 수익 극대화를 위해 투자비용 축소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나서면서 그 여파가 고스란히 중소 네트워크 장비 업체로 전이되고 있는 형국이다.
◇최저가 입찰제로 출혈경쟁 반복 = 통신사에 대한 장비업체들의 가장 큰 불만 사항은 업체간 출혈경쟁을 유도하는 최저가입찰제다.
신생업체들의 경우 레퍼런스를 획득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제조원가 이하로 가격을 써내는 경우가 많은데, 통신사들은 이런 업체를 납품업체로 선정하면서 다른 업체에도 동일한 가격을 요구하는 때문이다.
이와 관련 업계 관계자들은 “예전에 케이블 모뎀 업체들이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출혈경쟁을 벌이다 결국 모두 문을 닫았다”며 “우리도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까 두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25만원 이상이던 FTTH용 장비가 최근 들어서는 6만원에 공급된다. 또 17만원대를 유지했던 IPTV용 세트톱박스 가격도 불과 몇 개월만에 13만원대로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이같은 대형통신사 공급가격이 금방 오픈돼 외국 기업들도 동일한 가격 내지는 더욱 낮은 가격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결국 수출을 위한 레퍼런스 확보를 위해 제조원가 이하에 응찰했던 업체 입장에서는 가격만 떨어뜨리고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라며 “이런 이유로 KT가 민영화된 이후 도산하는 장비업체들이 크게 늘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유지보수는 무조건 공짜? = 장비의 워런티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유지보수 비용을 내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이어져 장비업체들의 손실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안그래도 최저가 입찰 때문에 수익을 남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지보수 비용은 장비업체들로서는 최대 고민거리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워런티가 지난 이후에는 정당한 서비스 요금을 지불하던지 아니면 새 장비를 구입하는 것이 맞지만 힘없는 장비업체들은 통신사에서 납품업체를 바꿔버릴까 두려워 말도 못꺼내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업체들의 관심이 시스코의 서비스 유료화 정책에 모아지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라며 “이제는 통신사들도 장비업체들과 상호 윈윈할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 줘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재고 부담은 장비업체 몫 = 장비업체들이 원재료를 구입해 제품을 생산하려면 보통 4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통신사들은 최종 납품업체를 선정하면 4주 안에 공급해 줄 것을 요구한다. 재고 물량을 없애기 위함이다. 결국 장비업체들은 납품업체로 최종 선정되기 훨씬 이전부터 재료를 구입해 제품 생산에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자칫 납품업체에서 탈락하게 되면 고스란히 재고로 떠안아야 하는 부담이다.
더구나 일부 통신사의 경우는 최종 납품업체 선정을 앞두고 3배수 정도의 후보업체에 최종 경쟁에 올랐다며 미리 준비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기업의 경우 납품업체에 최소한 8주 이상의 준비시간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와 관련 한 업체 관계자는 “VDSL 장비가 50MB급에서 100MB급으로 바뀌는 바람에 40억원 상당의 장비를 재고로 떠안았는데 해외시장에 떨어버리려 해도 힘들어 골치를 썪고 있다”고 토로했다.
김순기기자@전자신문, soonk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