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CEO]김영달 아이디스 사장

[파워CEO]김영달 아이디스 사장

 사업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학생. 김영달 아이디스 사장(40)의 첫인상이다. 주위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사업하는 사람처럼 안 보인다고 하고 김 사장 자신도 학교(KAIST) 다닐 때까지만 해도 사업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고 주변에 가족이나 친지들도 사업 쪽으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 선후배·동기 6명과 의기투합해서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김 사장은 아이디스를 세계 1위의 DVR 업체 대열에 올려놨다. 사업을 재미있어 하고 또 하길 잘했다는 김 사장은 타고난 사업가다. 굴지의 대기업처럼 규모는 크지 않더라도 기술력 하나로 세계 1위에 올라보겠다는 꿈을 이룬 김 사장. 삼성동 집무실에서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은 그의 경영 철학과 삶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 “오케이! 그렇게 해보자.”

 사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김 사장이 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있었다. 김 사장은 95년 말 KAIST 지도교수로 있던 이광형 교수가 “한국에서만 공부하면 시야가 좁아질 수 있으니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에 가서 일 좀 해보고 오라” 해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PSI라는 원자현미경을 만드는 업체에 들어갔고 1년을 2개월 못 채운 10개월 남짓을 그곳에서 생활했다. 실리콘밸리에 머무는 동안 김 사장은 제품을 만드는 SW 엔지니어로서 호기심을 갖고 움직여야 하는데 거기서 놀란 건 첨단기술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실리콘밸리의 화려함이었다. 스탠퍼드대학의 학생들과 HP·쓰리콤·애플 같은 말로만 듣던 회사들에 매료된 것. 김 사장은 대부분 창고에서 시작했지만 규모적인 측면에서는 우리나라 대기업 수준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기업으로서 한 분야를 계속해서 치고 나가는 것이 굉장히 와닿았다고 회고한다. 미국 생활을 마칠 무렵 김 사장은 이미 연구원이나 교수를 꿈꾸는 공학도가 아닌 예비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귀국한 김 사장은 동료에게 “기술중심의 작은 벤처기업으로 세계 1위 기업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동료는 흔쾌히 “오케이! 그렇게 한번 해보자”고 화답했다. 사업 아이템도 정하지 않고 얘기한 건데 다들 의기투합이 됐다.

 # 아르바이트비 털어 창업

 DVR란 사업 아이템을 찾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김 사장의 전공은 전산학 쪽인데 인공지능 분야에서 퍼지이론을 했고 다른 창업 멤버들도 로봇비전, 멀티미디어 네트워크 등 다양한 분야 전문이었다. 다양한 전공을 활용할 수 있는 보안 쪽을 선택한 것이다. 반도체나 이동통신처럼 최첨단 기술에 의해 이끌어져 가는 분야는 아니지만 30여년 전부터 꾸준히 성장해온 분야이고 절대 없어지지 않는 시장이기 때문이었다. 마침 아날로그 장비가 주류를 이루던 보안시장이 디지털기술에 의해 변화해 가는 시점이었고 젊은 공학도들이 기술이라는 하나의 무기로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시장이었다. 그리고는 김 사장은 연구소 프로젝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벌어 모은 3000만원과 창업멤버의 부담을 통해 5000만원을 만들어 아이디스를 설립했다.

 # IMF도 벤처 붐도 모두 비켜갔다(?)

 김 사장이 아이디스를 설립한 것은 97년 9월이다. IMF 외환위기가 몰아닥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IMF가 터졌을 때는 워낙 초기단계라 주로 개발에 주력하고 있어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창업멤버가 모두 학생신분이었기에 인건비 지출 문제도 없었고 개발하는 데 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IMF 이후 바로 벤처 붐이 있었는데 벤처 붐도 아이디스에는 별 상관이 없었다. 사업 초기부터 결심한 바가 있었다. 주변의 금전적인 도움, 이를테면 투자를 받는다든지 집안의 돈을 끌어쓴다든지 회사에 부채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는 데 조급성과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벤처 붐 때는 여의도에 있는 사람들(창투사 등)이 답답해 하기도 했다. 당시 창업 멤버 구성이 좋아 그중 한 명이라도 손 들면 수십에서 수백억원의 투자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

 # 사업은 즐겁게, 행복하게

 창업 4년 만에 코스닥에 상장했다. 김 사장은 창업 초기만 해도 주위에선 투자도 안 받고 하다 보니 더디게 간다고 했지만 막상 코스닥에 상장해놓고 보니 다들 ‘급성장했다’고 판단했다며 웃음 지었다.

 “사업이 되게 재미있어요. 그리고 사업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힘들 때도 많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제가 그렇게 힘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구는 자살을 몇 번 생각해보기도 해야 진정한 중소기업 사장이 된다고 하지만 그랬던 적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 사장은 그저 즐겁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처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김 사장은 “비율로 따지면 80% 이상을 즐겁게 사업을 하는 것 같다”며 “예전엔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가는, 이른바 벤처 초창기에 그런 부분들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도 즐거웠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육체적으로 힘드는 것은 별것 아닌 것 같고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들이 문제인데, 결국에는 모든 일이 즐거워서 해야 하는데 정신적으로 힘들다면 이 사업을 안 했겠죠. 안 그러면 뭐 할라고 사업을 하겠습니까.” 즐거운 사업가다운 대목이다.

 # 달러 버는 것이 좋다

 아이디스는 생산하는 제품의 대부분을 수출한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의미도 있지만 김 사장은 수출이 즐겁다. 왜냐하면 김 사장은 달러 버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사실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제조업인데 과거 제조업 하면 인건비 따먹기 수준이었는데 아이디스는 제조업이면서도 이익률이 20%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10분기 연속 2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김 사장은 해외에 나가도 자부심을 느낀다. 최소한 동등한 레벨 혹은 이상 레벨이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하도급 제조업이 아니라 우리가 기술적으로 항상 이끌어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지멘스나 타이코, 하니웰 등 쟁쟁한 업체들을 만나고 이야기 하다 보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 세 가지 모토

 창업 4년 만에 코스닥에 상장했을 때 김 사장은 직원들에게 “97년에 법인으로서 출생신고를 했고 2002년엔 코스닥 상장을 통해 성년식을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스닥에 상장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경제사회라는 부분에 성인으로서 등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목표가 아니라 책임지고 시작할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코스닥에 상장하고 나면 창업 멤버들이 많이 사람들이 나가고 회사 모양도 바뀌고 하는데 10년이 지난 아이디스에는 창업멤버들이 그대로 있다. 초심이 변하지 않은 것이다.

 김 사장에게는 세 가지 모토가 있다. 그중 하나는 ‘회사는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이윤이라는 게 많고 적음이 아니라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고 회사 안에 있는 직원들이 삶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이익을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아이디스가 기술기반으로 세계 1등 하는 분야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미 이 목표는 달성했고 이제는 2위와의 차이를 벌리는 것이고 시큐리티 전문그룹으로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위상을 갖추는 것이 10년 뒤 그림이자 목표다. 나머지 하나는 즐겁지(행복하지) 않으면 사업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복리후생은 웬만한 대기업 수준으로 하고 있고 10년째 수익을 공유하고 있다. 수익의 30%는 연구개발(R&D)에, 30%는 새 사업을 위한 축적 그리고 다른 30%는 직원들 몫이다. 이 중 30%는 현금 인센티브로 지급된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주주에게 돌아간다. 2006년에 160억원의 수익을 남겨 16억원을 인센티브로 지급한 김 사장은 지난해에 더 많은 이익을 남겨 올 겨울 두둑한 보너스를 직원들에게 안겨줄 작정이다.  

◆김영달 사장은

 김영달 사장은 87년 대구 능인고를 졸업하고 KAIST에서 학부와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KAIST 박사 과정 중이던 96년에 창업을 생각했고 이듬해 실험실 동료들과 함께 아이디스를 설립하며 DVR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한 분야에서 세계 제일이 되기 위해서는 회사 역량을 한곳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영상압축, 다차원 신호처리, 네트워크, 멀티미디어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10년째 달리고 있다. 지난해 1월에는 DVR누적 매출 3000억원을 달성했고 세계 DVR 시장 1위의 목표도 달성했다.

 무차입 경영을 고집하며 최근에는 회계학회에서 만든 투명회계대상을 받을 만큼 회사도 복잡하지 않게 경영하고 있다. 세계 주도권을 잡는 선진국들의 가장 큰 기반은 과학기술이었다고 강조하는 그는 앞으로 장학금을 내더라도 꼭 공대에 하고 이공계 인재를 양성하는 데 일부분을 기여하겠다는 포부다.

주문정기자@전자신문, mj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