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의 맛있는 영화]일제시대 연애 잔혹사

 ‘일제 시대 연애 잔혹사’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겐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외상후증후군)다. 일제 35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놨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인성을 말살시켰고 박정희식 개발 독재를 낳았다. 일본 트라우마는 영화·드라마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시대극의 주제를 거대 담론으로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친일과 반일 등 박제된 콤플렉스가 작품을 지배했다. 하지만, 최근 이런 지형이 균열이 생겼다. ‘딴스홀’을 통해 시대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바꾼 속칭 ‘일제 연애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국, 민족 따위는 버린 지 오래= 사실 일제 시대극이 ‘거시’에서 ‘미시’로 변형을 시작한 곳은 다름아닌 소설이었다. 지난해 출간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연애의 시대’ 등은 식민지 시대 룸펜과 데카당으로 대표되는 지식인, 경박함과 자주성을 오고 간 신여성을 등장시켜 일제시대가 여명과 땅거미가 동시에 드리워져 있던 이질적인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경성을 활보하던 모던걸도 총독부에 돌을 던지던 독립투사도 일제 강점기를 함께 보낸 것은 다를 바 없다.

 소설에서 시작한 바람이 영화로 옮겨 붙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혁명 따윈 개나 줘버리라”고 외치는 유쾌한 모던보이를 그린 ‘경성스캔들(KBS)’, 1940년 신식 병원을 무대로 한 공포극 ‘기담(2007년)’ 등이 방영됐으며 올해는 ‘원스어폰어타임’ ‘모던보이’ ‘라디오데이즈’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일제시대에 대한 재조명은 얼마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원의 미학’에 기인한다. 복원의 미학은 인터넷의 성장과 맥을 같이한다. 네티즌이 찾아낸 당시의 일상 생활사는 일제 시대의 우울함을 걷어내고 ‘민중의 역사’를 호명하기 충분했다.

 ◇독립군은 가고 사기꾼만 남았다= 오는 31일 개봉하는 ‘원스어폰어타임(감독 정용기 출연 박용우·이보영)’은 일제 연애사 영화의 현재를 보여주기 충분하다. 이 작품은 어드벤처라는 당의정을 통해 일제시대 민중사를 재조명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석굴암 본존불상의 이마에 박혀 있었다고 알려진 전설 속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암투를 그린 이 영화의 전개 방식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할리우드보다 더 할리우드적이다. 주인공 간 러브 라인이 생략될 뿐 모든 인물의 특성은 ‘인디아나 존스’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원스어폰어타임의 매력은 바로 ‘경성’이라는 무대에 있다. 정용기 감독이 그린 ‘1940년 경성 젊은이의 삶’은 상투적인 주제라는 약점을 날려버릴 만큼 생생하다. 특히 영화의 주무대인 카페 ‘미네르-빠’는 화려한 조명과 현란한 안무를 통해 무정부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일제시대 말 경성의 분위기를 68년 후에 배달한다. 기자 간담회에서 정 감독은 “미네르-빠가 이야기가 전개되는 주무대여서 당시 분위기를 내기 위해 가장 신경썼다”며 “총 60억원 중 이 카페를 짓는 데만 1억원 이상이 투입됐다”고 말했다.

 또 “민족혼이 밥 먹여주나? 오카네가 아리마센인데”라고 말하는 봉구의 대사는 독립투사만을 봐왔던 우리에게 모던보이(걸)의 현실 인식을 제대로 전달해 준다. 20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고민도 우리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한정훈기자@전자신문, ex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