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의 맛있는 영화]점퍼

 이집트 스핑크스 위를 유유히 걷고 있던 데이비드. 스핑크스의 정기를 받았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1초 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로마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의 웅장함을 즐기는 것도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데이비드는 런던 빅뱅 위에서 곡예를 한다.

영화 ‘점퍼(감독 덕 라이먼, 출연 헤이든 크리스텐슨, 새뮤얼 L 잭슨)는 인간의 오랜 욕망인 공간 이동이라는 능력을 부여받은 액션 히어로의 이야기다.

 하지만 배트맨과 같은 슈퍼 히어로물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영화 등장하는 점퍼들(공간을 이동하는 초능력자)은 케케묵은 관습에서 벗어난 뉴제너레이션 초능력자. 도덕적인 틀에 갇혀 있던 선배 히어로들을 비웃는 이들은 6대륙 11개국을 넘나들며 관객의 일탈 욕구를 200% 만족시킨다.

 지난 1940년 이후 마블 코믹스 등을 통해 탄생한 미국산 초인(超人)들의 주관심사는 ‘사회 정의 구현’이었다. 그들은 사리 사욕과 공적 이익 사이에 고민하지만 선택은 항상 ‘me’가 아닌 ‘us’다. 하지만 점퍼들은 다르다. 공간을 넘나드는 경공술을 지녔지만 자신의 기술(?)을 남을 위해 쓸 생각은 전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점퍼는 다른 초능력 슈퍼 히어로물과 결별한다. 각색자 데이비드 고어는 스티븐 굴드의 원작을 180도 변형시켜 점퍼에게 자아 실현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우울한 가정사에 짓눌려 살던 데이비드(헤이든 크리스텐슨)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지지리 궁상’인 줄 알았던 자신이 공간을 제어할 수 있는 점퍼였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은행 금고로 가 현금을 챙기고 도쿄에서 점심을 로마와 이집트에서 여흥을 즐긴다. 공간을 제약을 마음껏 ‘점프’하는 것에 익숙해지자 생활은 더욱 흥청망청된다. 중세 시대부터 점퍼를 쫓고 있는 비밀 결사대 ‘팔라딘’ 때문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지만 고민도 잠시. 자신의 여자 친구를 위해 또 다른 점프를 고민한다.

 차세대 영웅으로서의 점퍼는 시대적 관심에는 눈을 감는다. 영화 점퍼에는 편의점을 터는 강도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 다른 점퍼인 그리핀(제이미 벨)은 다섯 살 때 조실부모했지만 사막 한가운데서 닌텐도DS를 즐기는 게 주된 일이다. 그가 ‘SPACE LEAP’를 결심하는 때는 딱 두 가지다. 생활 자금이 부족하거나 부모의 원수인 팔라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순간이다. 그리핀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고로 뉴욕에 있던 트럭 운전사를 러시아 체첸으로 이동시키지만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그를 다시 데려올 생각이 전혀 없다.

 점퍼의 인간적 욕망은 출연 배우의 개인 이력과 합쳐져 절정을 이룬다. ‘본아이텐티티’ ‘미스터&미세스 스미스’를 연출했던 덕 라이먼은 시대정신을 ‘회 쳐 먹은’ 신개념 히어로를 위해 과거 슈퍼 히어로물의 스타를 호명한다. 차세대 영웅의 탄생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연출이라면 비약적인 상상일까.

 ‘스타워즈 에피소드2’에서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분했던 헤이든 크리스텐슨은 점퍼에서 여자 친구(레이첼 빈슨)를 위해 집 한 채를 고스란히 공간 이동시키는 데이비드로 출연한다. 그리핀의 제이미 벨도 마찬가지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킹콩’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슈퍼 히어로에 다름 아니지만 점퍼에서 그는 관객들의 욕망을 대리만족시키는 사적 영웅으로 등장한다.

한정훈기자@전자신문, exis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