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CEO]이억기 파이컴 부회장

[파워 CEO]이억기 파이컴 부회장

 그에겐 ‘장인(匠人)’의 기품이 나온다. 기골이 장대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어울리지 않게 다부진 몸집의 이억기 파이컴 부회장(54)은 부품산업 지킴이 그대로다. 79년 와이어하네스를 시작으로 부품산업계에 뛰어들었으니 내년이면 만 30년이다. 지난 30년 동안 철저하게 제조업만 해왔다. 그것도 100% 국산화만 해온 이 부회장. 해마다 10조원 규모의 로열티가 외국으로 나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인식하고 일찍부터 특허 획득에 매달렸다. 이제는 멤스(MEMS) 기술과 광학적인 기술을 융복합화한 분야와 바이오·에너지 분야로 사업을 확대해 신수종 사업을 찾는다. 그의 인생을 거슬러올라간다.

# ‘가난’ 그 어려웠던 시절=이 부회장은 어렵게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당시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이었던 배고픈 시절이다. 가난 때문에 2년을 쉬고 고등학교를 입학하니 중학교 1년 후배가 선배가 돼 있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줄곧 반장을 했고 교련 연대장도 했다. 천성적으로 치고 나가는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 그랬다고 그는 말했다.

고3 때의 일이다. 반장인 그는 당시 같은 반 친구들에게 ‘우리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출석이라는 것은 학생에게 기본이니, 100% 신기록을 세워보자’고 제안했다. 한 학생이 여름방학동안 생계를 위해 지하철 공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쳐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6개월 기록에 만족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 부회장은 지독히도 가난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짠하다고 되뇐다.

# 외양간에서 시작한 와이어하네스 사업=병역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다. 주유소에서 영업을 하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년 여간 있으면서 서울 지리와 세상 물정도 익혔다. 성심을 다해서 영업을 뛴 덕에 영업실적이 좋았다. 그러던 78년 가을, 한 선배가 사업을 권했다. 와이어하네스라고 커넥터에 전선을 연결한 부품 사업이다. 전자제품과 자동차산업을 육성하던 시절이니 사업성은 있어 보였다. 여러 달 자료도 찾아보고, 검토한 결과 타당성이 있다고 본 그는 이듬해 6월 창업을 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경기도 성남 백현동 잣나무 언덕 위에 소 5마리를 기르던 외양간을 얻어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비교적 순탄한가 싶었는데 10.26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바로 수 된서리를 맞았다.

80년대 중반 들어서야 회사가 정상화했다. 결혼도 이 때 했다. 나아지는가했더니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 바람을 맞았다. 인건비가 순식간에 100%씩 올라가기도 하니 더럭 겁이 났다. 이때 이 부회장은 다시 업종전환·품목 추가를 생각하게 됐다.

# 인생의 멘토 그리고 기술에 대한 믿음=‘뭘 할까’하고 한창 고민할 무렵,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했다. ‘산업의 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표현도 익숙해졌다. 반도체 분야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창업 아이디어를 준 선배가 이번엔 ‘프로브카드’사업을 권했다. 회로에 불량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웨이퍼 검사 장치다.

이 선배는 84년 이 부회장이 결혼할 때 중신을 서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유수의 커넥터 업체인 한국몰렉스를 국내에 들어 오게 한 주인공이자 엘코코리아를 설립한 우리나라 커넥터 산업의 산 증인이다. 지금은 업계에서 은퇴하고 캐다나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마음속엔 늘 ‘유형근’이라는 이름 석자가 자리 잡았다.

이 부회장은 선배의 판단과 함께 믿은 건 자신의 기술이다. “ 워낙에 배운 것이 없어 믿을 수 있는 것은 저의 손밖에 없었다” 와이어하네스 사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경험도 했고, 기술 가능성도 믿고 프로브카드 사업을 90년대초부터 시작했다.  

# 반도체에 필이 꽂히다=곧바로 반도체산업협회에 회원 가입을 했다. 협회 세미나도 쫓아다녔다. 한 세미나에서 ‘필’이 꽂혔다. 진대제 당시 삼성전자 사장이 반도체산업협회 총회에서 설명한 ‘반도체 산업에 대한 로드맵’을 들을 때다. ‘반도체 기술은 1M에서 기가(G)로, 또 테라(T)로 발전해 갈 텐데 그 디바이스는 개발하고 만드는 사람들의 몫이라면 테스트를 누가 할 것인가. 차세대 검사장치는 누가 만들지’

그는 이 질문을 스스로 하고 ‘내가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대답도 했다. 차세대 프로브카드에 대한 투자를 결심했다. 그는 프로브카드를 100% 손으로 만들던 방식에서 궁극적으로 반도체 웨이퍼로 만들어 주는 게 솔루션을 찾는 게 가장 좋겠다 해서 멤스 기술을 공부했다. 결정과 함께 2000년부터 멤스 기술을 기반으로 한 프로브카드로 가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다. 당시 회사의 재무 상황에선 불가능한 투자였다. 이 부회장은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런 투자를 결정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잘했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며 “그때는 완전히 뭔가가 확 꽂혀버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 특허는 나의 그림자=“그때 우리 건물이 있었나, 설비가 있었나, 사람이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000년 당시만 해도 파이컴이 멤스 프로브카드 사업에 뛰어들기에는 물리적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멤스기술로 새로 개발하다보니 특허의 중요성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지금도 사무실 책상 책꽂이에 쑥색 커버로 된 책들이 수 십권 꼽혀 있는데 이게 제 재산이고 희망입니다.”

특허 내용을 모아 책으로 낼 때 직원들이 제목을 뭐로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는 ‘특허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이 부회장은 “외국에 로열티 주는 금액이 잘은 모르겠지만 연간 최소한 10조는 되지 않을까”라면서 “우리가 외국으로 주는 로열티는 국부손실이며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신출내기 기업이 특허에 온 힘을 집중하다보니 성장통도 있었다. 외국 경쟁사로부터 특허 제소가 들어왔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 부회장은 “분명한 것은 우리 회사가 갖고 있는 특허로 제품을 개발한 것이고 지금도 떳떳하게 조업하고 있다”며 “글로벌 회사로 성장하기 위한 극복해야 할 하나의 통과의례로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가난 얘기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나라 현대사와 산업 역사를 보면 엄청난 부침이 있었고 질곡이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것도 지킬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키고 싶어도 지키지 못했던, 그런 국가적으로나 회사 입장에서 봐도 가난이라는 것은 참으로 큰 장애였던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대표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이 승리를 거듭하면서도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고 했던가. 이 부회장은 “지금도 나는 매우 가난하다는 생각으로 늘 헝그리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 사회, 사회인들 모든 분야를 봤을 때 우리가 헝그리마인드가 없어졌다”며 “이것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골프도 기본이 충실해야=일밖에 모르는 그에게 유일한 오락거리는 골프다. “전 골프를 안했으면 죽었을 겁니다.” 이 부회장은 “골프 매커니즘이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 참 고맙다”고 덧붙였다. 골프는 모든 경우에 대한 룰이 있어 이것을 공부하면서 점수를 지킨다는 게 재미있다고 한다. 특히, 아무것도 계량화돼 있지 않은 자연과 승부를 한다는 것 자체도 멋있다고 덧붙였다. 이 부회장의 골프 핸디캡은 ‘0’이다. 이븐파를 친다. 이 부회장은 이븐파가 기본이며 늘 기본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더 큰 기술을 위해=“파이컴은 멤스기술을 갖고 제품화하고 있는데 이 멤스산업에 대해 사람들은 너무 왜소하게 봅니다. 너무 전문화한 일부로 보는데 멤스산업은 반도체 산업이나 디스플레이 산업이 세계 최대 산업이듯 세계 최고·최대 산업이 될 것입니다.” 이 부회장은 “멤스산업이 그렇게 되기 위해 차근차근 기술축적을 해왔다”며 “옛날엔 생각을 했어도 그걸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이제는 생각만 한다면 모두 실행 가능한 시대가 됐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 부회장은 파이컴의 신수종 사업으로 멤스기술과 광학적인 기술을 융복합화한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능력있는 인재들도 포진했다. ‘바이오·메디컬을 포함해 당대 최고의 기술은 인간을 위해 쓰인다’는 소신으로 연구개발에 진력한다. 올해가 지금까지 파이컴 역사를 통해 어느 해보다도 역동적인 해가 될 것이라는 이 부회장의 기대가 와닿는 대목이다.

◇이억기 부회장은

강원도 평창 육민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 바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79년에 백현전자(파이컴 전신)를 설립해 와이어하네스 사업을 시작했다. 90년대에 프로브카드로 업종을 반도체 장치산업으로 전환했으며 2000년 들어 멤스기술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디스플레이산업협회의 전신인 디스플레이장비재료산업협회 설립을 주도하며 2년간 회장을 맡아 업계 간 융합을 이끌어냈다.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등의 대학에서 운영하는 최고경영자 과정 및 최고산업전략과정 등을 수료했다.

 주문정기자@전자신문, mj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