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7)태동기­-5.16시대

 국산 최초 라디오 A-501이 1959년 등장했지만 밀수되는 외산 제품에 밀려 판매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A-501이 전국 전기상점에 출하될 당시 미군PX를 통해 밀반입되던 외제 라디오는 월평균 1만2000대나 됐다. A-501의 첫 생산량이 80대였으니 그 규모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밀수품을 강력히 단속하고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펼치면서 국산 전자제품이 싹을 틔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정보 갈증, 앰프방송으로 해결=라디오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 1950년대 방송 수신기는 유선방송 사업을 통해 ‘앰프 방송’ 또는 ‘스피커 방송’을 유선 스피커로 듣게 하는 방식으로 보급됐다. 농어촌에 전깃불이 안 켜지는 가정이 많고 라디오 가격이 비싸 국정을 농어촌까지 신속하게 홍보하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유선방송의 일종인 앰프 방송이었다. 1957년 7월 정부에서 시범으로 경기도 광주군 역리에 집집마다 스피커를 가설했는데 이것이 첫 유선방송 사업이었다. 그 후 이런 마을을 앰프촌이라 불렀다.

 1957년부터 1961년 사이에 전국에 400여 앰프촌을 무상으로 설치했고 여기에 가설된 2만여개 스피커로 농어민 약 40만명이 방송 혜택을 받게 했다. 그 후 민간사업자의 사설 유선방송사업체가 전국 도처에 출현해 1960년대 초에는 이미 민영앰프가 관영앰프를 양적으로 앞질렀고 규모도 월등히 커졌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국민의 정보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결국 새로운 미디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국산 라디오 기사회생=1950년대 말 라디오 수신기 보급은 1959년에 겨우 30만대를 넘어섰고 1960년에도 40여만대에 그칠 정도로 보급이 부진했다. 그나마도 도시에 집중돼 있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1960년대 라디오 1대 값은 2만여환. 쌀 한가마에 400여환이었던 시대니 웬만한 사람은 꿈도 못 꾸는 고가품이었다.

 금성사가 내놓은 첫 국산 라디오인 A-501도 외국산에 비해 30∼40% 저렴했지만 여전히 일반 국민에겐 너무나 비싼 가격이었고 고성능의 외국산 제품을 선호하는 수요자의 기호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 국산 라디오의 운명을 바꾼 것은 5·16 군사쿠데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밀수품 단속과 함께 국산품 애용 운동을 벌여 외제 라디오의 수입을 금지하고 혁명 내용을 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농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 결과 국산 라디오 보급은 폭발적 신장을 기록했다.

 1961년 9월 라디오 보급대수가 전년에 비해 50만대 증가한 89만3000대였으며 1962년 말에는 134만대에 달했다.

 ◇박 전 대통령, 금성사 전격 방문=박 전 대통령이 외제 라디오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5·16 이후 부산을 방문했던 그는 연지동에 있던 금성사를 전격적으로 찾아가 라디오 생산시설을 둘러봤다. 이 자리에서 국산 최초 라디오인 A-501을 개발한 김해수씨가 밀수품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금성사의 고충을 토로한 후 ‘밀수품 근절에 관한 최고회의 포고령’과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추진이 발표되면서 금성사는 특수를 누리게 됐다.

 라디오 보내기 운동은 처음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1962년 7월 7일 공보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국적인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금성사 측이 최고회의를 설득해 이원우 공보부 장관을 전면에 등장시킨 것이었다. 이어 일주일 후 7월 14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이 운동을 직접 후원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각 신문은 사고를 통해 농어촌에 보내게 될 라디오 현품과 현금을 수집, 모금하기에 이르렀다. 금성사와 최고회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확산된 이 운동은 1963년까지 계속됐는데 이렇게 해서 전국 농어촌에 보낸 라디오가 무려 20만대를 넘었다.

 ◇부품 국산화도 진전=1966년 동양방송의 FM방송을 계기로 해서 1966년 금성사는 일본의 히타치와 기술도입계약을 하고 1967년부터 FM수신기 생산에 착수했다.

 1966년을 전후해 라디오 수신기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 심한 경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원자재의 국산화 비율은 수출과 내수용을 합해 1967년에는 27.5%였으나 1968년도부터는 크게 개선돼 57.5%로 증가했고 1970년에는 70%로, 1971년에는 90%를 초과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라디오 조립생산으로 싹트기 시작한 한국의 전자산업은 1966년 8월 금성사가 19인치 흑백TV(VD-191)를 생산하며 또 한번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흑백TV는 콘덴서·저항기·브라운관 등 300여종이 넘는 전자부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취약한 부품업계에 막대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국산 전자제품 해외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63년을 전후한 시기, 국내에서 라디오를 생산하던 곳은 금성사 외에도 삼양전기·태양전기·아이디알로 3개 기업이 더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영세기업 수준을 탈피하지 못해 그 생산 규모는 금성사와 비교할 바가 못 됐다.

 일례로 1962년 국산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해외 수출이 시작됐는데 1965년도 상공부 전기공업편람에 따르면 그해 4사의 라디오 총 수출액은 66만5916달러, 이 가운데 금성사가 기록한 액수는 전체 90%에 가까운 59만5698달러에 이르고 있다.

 국산 전자제품의 해외 수출은 상공부가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1962년 홍콩 등지에 동남아 통상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시작됐다. 이때 사절단에 소속됐던 금성사 관리부장 구자두(구인회 LG창업주의 넷째 아들·현 LG벤처투자 회장)는 홍콩의 무역회사 바노 측과 트랜지스터식 라디오 18대를 견본 수출하기로 합의했다. 또 이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뉴욕의 아이젠버그사에 T-703 등 62대(594달러)분의 수출 계약을 성사시킴으로써 1962년 11월 국산 전자기기의 첫 선적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됐다.

 그러나 이때의 국산 라디오 수출은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던 소니·내셔널·RCA 등 일제와 미제에 대항해서 시장을 개척한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만 했다.

 주력 수출품이었던 T-703은 내수 가격은 3300원이었는데 비해 수출가격은 1.3달러에 불과했다.

 이 같은 출혈수출을 강경하게 밀어붙인 것은 군사정부였다. 군사정부는 공산품의 수출을 적극 장려한다는 명목으로 해당 업체들에 출혈 액수만큼 보상해주는 정책을 폈다.